석포는 울릉도에서 독도가 자장 잘 보인다는 마을이다. 예전 이름은 한 번 살다 보면 정들어 나가기 어렵다고 해서 정들포라고 불렀단다. 울릉도를 한 바퀴 도는 해안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섬을 빙 돌아 맨 끝에 가야 만날 수 있던 곳이라 오지 중의 오지였다.
영일만에서 출발한 페리호가 밤새도록 그르렁거리며 파도를 헤치고 닿은 곳은 저동 옆 사동이다. 예전에는 저동에 배를 댓지만 몸집이 커서 이젠 물이 깊은 사동에 댄다고 한다. 사동항에서 죽도 관음도 쪽으로 뚫린 세련된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니 아무래도 내가 섬이 아니라 어느 도심을 드라이브하고 있는 것 같다. 정말 여기가 울릉도가 맞나? 이제는 산자락을 깎아 공항까지 만들고 있으니 그야말로 몇 년 사이에 천지가 개벽해도 한참을 뒤집어 놓았다.
해안도로가 접어진 곳에 멈칫하는 데 육지에서부터 동행한 집주인은 가파른 산말랭이를 가리킨다. 이런 길은 차 대신 경운기로 가야 할 것 같다면서 진땀을 빼는 데 마음만큼은 이게 바로 내가 아는 울릉도라며 나를 토닥인다. 배에 싣고 간 자동차까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굉음을 내며 한참을 씨름한 끝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대밭에 둘러싸인 언덕 위에 야트막한 집 한채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겨울바람을 씻어내고 있다.
그 집 마당 발아래로 보이는 송곳산이 손에 잡힐 듯 장관이다.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아침 바다에 무지개까지 걸쳐있으니 사진에서나 봤을 풍경이다. 안주인은 여기를 어떻게 알았는지 사진작가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통에 여름에는 옷도 마음대로 못 입을 때가 많았다고 구시렁거린다. 건너편도 둘러보란다. 독도 쪽으로 관음도와 죽도가 보이는 풍광이 또 다른 한 폭의 그림이다. 이곳이 바로 울릉도에서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둘도 없는 곳이라며 한 열흘 마음껏 쉬었다 가란다.
울릉도로 시집온 안주인은 아내의 어릴 적 친구다. 간밤에도 늦도록 울릉도에서 살아온 오랜 이야기에 침이 마를 줄 몰랐다. 이곳에 집만 짓고 살기에는 경치가 너무 아깝다고 했더니 예전엔 건너편 해돋이 전망대까지 모두 남편 산이었단다. 그 시절에 남편은 서있기도 어려운 가파른 산등성이에 죽기 살기로 혼자서 길까지 닦았다고 했다. 쓸데없이 헛고생을 했다고 눈을 흘기지만 내 보기엔 뚝심 있는 바깥양반이야말로 누구도 하지 못한 큰일을 해낸 것이다.
겨울철이라 배가 모두 끊겨 독도는 근처에도 못 간다니 울릉도 일출은 꼭 보아야 한다. 그동안 그 양반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 아침 저녁으로 전망대에 올라가 보았지만 제대로 된 해돋이나 해넘이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더구나 전망대에서 보이는 앞바다는 1905년 당시 무적이라던 러시아 발틱함대를 상대로 일본군이 러일전쟁이 벌인 곳이라고 한다. 유럽에서 출발한 드미트리 돈스코이호가 일본함대에 의해 침몰한 곳도 여기란다. 이 전쟁의 결과 제정러시아는 무너지고 일본은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하여 우리나라를 본격적으로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오늘은 날씨가 받쳐준다니 장엄한 일출과 그 역사의 흔적을 살펴볼 마지막 기회다.
긴 여행에 파김치가 된 아내가 깰까 고양이 걸음으로 어둠이 깔린 마당으로 나섰다. 여전히 사방은 어둡고 인적은 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다. 멀리 보이는 검은 바다에는 집어등을 켠 채 분주히 해안으로 돌아오는 어선 두어 척만 물살을 가르고 있다. 숨을 죽인 채 검푸른 수평선을 뚫고 솟아오를 아침 해를 홀로 기다렸다. 여명이 걷히는 하늘가에 검은 구름 떼가 운무 속에서 넘나드는가 싶더니 수평선에 줄지어 선다. 구름이 섬들이 되고 함대가 되어 열병식이라도 하는 듯 아침 해를 맞이하고 있다.
드디어 기다리던 일출이다, 해안 절벽 위 녹색 수목 위로 파스텔톤의 핑크빛이 곱게 피어오른다. 아나스타샤다. 분홍빛 러시아 제라늄 아나스타샤는 겨울이 지나고 화사한 봄날이 되기를 기원하는 부활의 꽃이다. 호흡마저 정지한 채 눈을 감으니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부활’ 속으로 빠져든다. 인간의 죄와 회개 그리고 참된 구원에 대한 질문이 떠오른다.
시간마저 멈춘 석포의 아침은 고요하고 장엄하다. 여행의 끝자락에 인간의 길 위에서 구원의 길을 마주했다. 내가 만약 소설 한 편을 쓴다면 그 시작은 이곳 석포의 아침이 될 것이다. 어둠이 걷히는 길옆에는 여기에만 자생한다는 울릉국화 한 송이가 석포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