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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01. 2023

아버지의 운전면허증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였다. 병원에서 오랫동안 계시다 돌아가셨으니 유품이라고 해봤자 별것도 없다. 검은색 성경 가방과 손때 묻은 지팡이가 전부였다. 오래되어 손잡이가 다 떨어질 것 같은 해진 가방 속에서 손목시계와 지갑 하나가 보인다. 언젠가 사드린 손목시계는 유리가 다 긁혀 있고 이미 멈춰 있다. 낡은 반지갑이 하나 보였다. 열어보니 손톱만 한 사진 속에서 아버지가 환하게 웃고 있다. 운전면허증이다.


  면허증 속 사진은 머리가 온통 하얗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틀림없는 내 아버지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버지는 사진 속에서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운전면허시험을 보면서 들떠있던 때 찍은 사진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평생 시골에서 사신 분이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는 지금처럼 사방 천지에 자동차가 돌아다니지 않았다. 나도 어릴 적에 자동차보다는 우리 마을 하늘 위로 높이 떠다니는 비행기부터 보고 자랐다. 그때는 명절이나 되어야 마을 앞 신작로에 검정색 지프 한 대가 나타날까 말까 했다. 그때마다 온 동네 꼬마들이 몰려나와 그 지프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그런 시절을 사신 아버지가 만년에 운전면허증을 따고 자동차를 직접 운전했다는 것은 참으로 천지가 개벽한 일이다.


  농사일을 하신 아버지는 평생 어딜 가든지 걸어 다닌 편이다. 나중에 자전거를 배웠지만 칠순 무렵부터 자전거를 타다 여러 번 넘어지거나 도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가족들은 위험하니 자전거 좀 그만 타라고 아버지와 싸우기 일쑤였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자전거 대신 차를 운전하겠다고 새로운 결심을 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혼자서 몰래 운전면허 시험공부를 하셨다. 아버지는 당시 국민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분이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중도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더구나 호랑이 같던 증조할머니가  2대 독자 손자가 공부를 하면 분명히 땅도 버리고 고향도 떠날 것이라고 굳게 믿으셨단다. 아버지가 꽤 똑똑했던지 당시 학교에서는 육성회비나 월사금 같은 것은 내지 않아도 되니 언제든지 학교에 오라고 했단다. 하지만 소년가장이었던 아버지는 결국 학교를 못 다니고 평생 땅만 파고 사셨다. 


  아버지는 어른들 몰래 서당이나 학교 선생님을 찾아가 어깨너머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는 명색이 박사학위를 받은 아들딸에게 ‘공부는 되로 배워 말로 써먹어야 한다’면서 논어 맹자나 성경 구절도 가르쳤다. 하지만 초등학교도 못 나온 분이 칠십이 넘어 운전면허 시험을 보는 것은 겁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무심한 자식들은 아버지의 이런 어려움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 날 뜬금없이 아버지가 차를 사야겠다고 선언했다. 온 식구들이 운전면허를 언제 땄냐고 놀라면서도 운전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자전거도 제대로 못 타는 양반이 큰일 난다고 뜯어말렸다. 아버지는 노기 어린 눈으로 교통비를 얼마든지 드린다는 자식들을 쏘아보았다. 그 황소고집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어코 아버지는 아들딸이 보내준 돈을 보태 중고로 작은 트럭을 한 대 샀다. 당시 시골 동네에 살고 계시던 노인들 중에 아버지가 유일하게 차를 몰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의 덜컹거리는 트럭은 장날마다 동네 사람들의 온갖 짐을 실어 날랐고 평소에도 일만 있으면 마을 사람들을 태우고 읍내를 다녔다. 한밤중에 그 먼 시골에서 우리 집까지 몇 시간을 운전하고 와서 나를 놀라게 한 적도 있다. 운전면허증을 딴 아버지는 당신의 트럭뿐만 아니라 동네의 교회 봉고차도 운전하였다. 운전면허증을 무슨 메달처럼 목에 건 채 운전대만 잡으면 아버지는 아예 젊은 청년으로 변했다. 어머니는 늘 옆자리에 앉아 차가 덜컹거리거나 말거나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눈을 감고 계셨다. 아마 그때가 아버지의 늘그막에 가장 신나는 시절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운전면허증 속에서 여전히 계면쩍게 웃고 있다. 아버지가 생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나도 눈을 감고 두 손을 깍지 낀다.


  아버지, 거기는 어떤가요. 하늘나라에서도 운전하세요? 면허증이 필요하면 여기에 있는 것을 보내 드릴게요. 이제 연세도 드셨으니 과속하지 마시고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다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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