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by 회인

내가 초등학교 오륙 학년쯤이었을 것이다. 기다리던 첫 음악시간에 나타난 선생님은 짧은 막대기를 지휘봉처럼 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키가 훤칠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멋진 할아버지 선생님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쭉 둘러보더니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갖고 있던 막대기로 왼손을 가볍게 때리기 시작한다. 그 박자에 따라 영어도 아닌 무슨 꼬부랑말로 작지만 힘이 느껴지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까나’에 나오는 아리아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처럼 눈부신 봄날에는 이 오페라가 시작할 때 나오는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를 들어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했다.


시골 촌놈이었던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와 뱃속에서 나오는 든든한 목소리에 홀리기라도 한 듯 빨려 들어갔다. 동요나 알던 어린 시절에 서양음악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때만 해도 오렌지라는 것을 구경도 못해본 촌놈이 그 향기가 뭔지는 알 턱이 없었다. 교회 종소리와 더불어 시작되는 마을 사람들의 합창소리처럼 은은하고 멋질 것이라고만 상상했다.


음악 수업이 끝나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이는 시간이었다. 포그 댄스 시간이다. 남녀 짝을 지어 서로 허리에 손을 올리고 인사를 한 뒤 확성기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서양식으로 춤을 추는 것이다. 여자애의 손을 잡는 것이 부끄러웠다. 운동장을 둘러보면 이미 조그만 나뭇가지가 여기저기 버려져 있다. 나도 얼른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고 내밀었다. 나뭇가지 끝을 잡을 줄 알았는데 그 여자애는 혀를 쏙 내밀어 보이더니 내 손을 덥석 잡는다.


춤이고 뭐고 머리가 아득해 왔다. 멀어졌다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그 여자애의 긴 머리카락이 나의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음악 소리는 왜 그렇게 길던지 진땀 나는 시간이었다. 마주 잡은 손에는 땀이 잔뜩 배었다. 땀이 나 미끄러운 손을 놓는 순간 시원한 바람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만다. 시골 학교의 운동장가에 있는 아름드리 아카시아에서 아찔한 꽃향기가 바람에 가득 실려 왔다.


오페라의 나라 이탈리아에 여러 차례 여행을 간 기억이 있다. 그때마다 어린 시절 생각이 떠올라 오렌지나무를 찾아보았지만 올리브나무뿐이다. 결국 오렌지나무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다만 물어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말 그대로 ‘시골 촌놈의 기사도’란다. 어릴 때는 그게 뭐를 까발리는 사람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 뜻을 듣고 보니 어쩐지 나처럼 촌놈이지만 의리에 불타는 사람 이야기인 것 같아서 그런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잠시 우리 학교에 오셨던 선생님의 이름은 벌써 잊어버렸다. 하지만 서양음악하면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부터 떠오른다. 서양의 낯선 오렌지 향기는 이제 아카시아꽃 향기가 되어버렸다. 아카시아꽃 향기가 아찔하게 흩날리던 그 운동장이 그립다. 왈츠를 추며 거꾸로 나를 리드하던 그 여자애도 그 교정의 아카시아꽃 향기를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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