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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23. 2023

친구인가 적인가

   가까운 이의 빛나는 재능이 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이런 질문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참으로 묘해서 친구(friend)인 동시에 적(enemy)인 경우가 있다. 나보다 특별히 잘난 것 없어 보이던 친구가 승승장구하면 겉으로는 박수를 보내도 마음 한구석은 알 수 없는 질투심이 꿈틀거린다. 결국 친구와 적은 동전의 양면 같다. 


  화가 폴 세잔과 소설가 에밀 졸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Cezanne et moi)’에서도 프레너미(frenemy)가 떠오른다. 프랑스 남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둘은 어릴 적부터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폴과 홀어머니에 가난한 집에 태어난 에밀. 그러나 둘의 인생은 반대로 풀렸다. 에밀은 소설가로 명성을 누렸으나 폴은 그리는 그림마다 누구한테도 인정받지 못한 채 점점 세상과 담을 쌓았다. 이후 둘이 결별하게 되는 데 그 결정적 계기는 에밀의 소설 『작품(L’oeuvre)』이다. 작품을 읽고 에밀이 폴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게 됐다고 한다. 이후 30년의 우정은 금이 가고 폴 세잔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번 다시 에밀 졸라를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피카소가 후세에 폴 세잔에 대하여 ‘나의 유일한 스승이며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했을 정도로 폴의 예술성은 위대했다. 불행하게도 에밀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폴의 재능을 끝내 알아보지도 못하고 인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밀 졸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세잔은 사흘 내내 통곡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들의 고향 액상 프로방스의 테제베(TGV) 역에는 출구가 둘이 있다. 하나는 ‘폴 세잔’ 하나는 ‘에밀 졸라’다. 두 출구는 마치 폴과 에밀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나 있다. 


  연인 사이도 상대방의 재능으로 고통을 받아 파국에 이른 사례가 있다.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의 경우가 그렇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보았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로 깊어져 예술혼을 꽃피웠지만 끊임없이 상대방의 재능에 좌절하고 고통을 받는다.


  평생의 친구가 나의 적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다시 생각하니 내 마음속의 적은 친구가 아니었다. 바로 나 자신이었다. 친구인 듯 적인 친구가 있어서 내가 성숙해질 수 있었다. 차라리 그런 친구가 하나도 없음을 탓할 일이다. 적으로 만든 친구의 진정한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없음을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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