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사나이

남자의 자격

by 이선우


사진학과를 다니던 시절, 나는 고향 울산의 끝섬 '슬도'에 매혹되어 있었다. 그곳은 울산이라는 도시의 모든 것을 압축해 놓은 듯한 곳이었다. 거대한 크레인들이 하늘을 찌르는 조선소와 파도에 몸을 맡긴 어촌마을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낭만 넘치는 곳이다. 현대와 전통, 산업과 자연이 어우러진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 나는 하루 종일 그곳에 머물렀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면 저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조선소 아저씨들이 낚싯대를 어깨에 메고 하나둘 몰려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쇳덩어리와 씨름한 거친 손들이 이제는 조심스럽게 낚싯줄을 다루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지만, 바다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평온했다. 일터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었을까. 운 좋게 고기를 많이 낚은 아저씨들은 그 자리에서 회를 떠 소주잔을 기울였고, 나는 그들 곁에서 얻어먹는 회 한 점과 소주 한 모금의 짠맛을 음미했다. 낯선 대학생을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그들의 너그러움이 고마웠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722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내 앞자리에 한 아주머니가 앉았다. 신발을 벗고 앉은 그녀의 얼굴에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불만이 응축되어 있었다. 입꼬리는 아래로 처져 있었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마치 오늘 하루만으로도 세상이 자신에게 빚진 것이 태산 같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불쾌함이 고스란히 공기 중으로 번져 나왔다.


버스가 조선소 앞에 멈춰 서자, 하루 일을 마친 노동자들이 줄지어 올라탔다. 콩나물 시루 처럼 만원이 됐다. 검게 그을린 얼굴들, 땀에 젖은 작업복, 그리고 피로에 절은 어깨들. 몇몇은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고, 어떤 이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루의 고단함이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배어 있었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에어컨을 최대로 틀었다. 뙤약볕 아래서 하루를 보낸 이들에 대한 무언의 배려였을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그때부터 그 아주머니의 입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추워 죽겠어!"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차 안을 가로질렀다. "기름이 썩어나냐, 에어컨 이렇게 세게 틀게!"

조선소 아저씨들이 하나둘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떤 이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어떤 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들 때문에 에어컨이 세졌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날카로운 말들이 화살처럼 그들을 향해 계속 날아갔다. 버스 안은 썰렁해졌다. 기사도, 승객들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가 어색한 침묵 속에서 고개를 돌리거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침묵은 그녀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만들었고, 그녀는 마치 그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듯 더욱 거칠어졌다.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말은 점점 막해졌다. 조선소 아저씨들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나는 속으로 답답했다. 누군가 말려야 하는데, 누군가 나서야 하는데. 하지만 나 역시 어린 학생일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뒤쪽에서 한 사내가 일어났다. 덩치가 산 같고 얼굴이 험상궂은, 그야말로 무서운 인상의 사내였다. 어깨는 넓었고 팔은 통나무 같았다. 그가 천천히 일어서는 소리만으로도 버스 안의 공기가 변했다. 아주머니쪽으로 걸어오는 그의 발걸음이 버스 바닥을 울렸다. 그제야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 큰 아저씨가 화라도 내면 어떻게 될까. 아주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려움이 그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모든 승객들이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그런데 그 사내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봄날 햇살처럼 따뜻한 미소였다. 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 무서워 보였던 그 얼굴이 이렇게 온화할 수 있다니.

"아이쿠, 죄송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거친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따뜻함이 있었다.

"우리 직원들이 여름 볕에 고생한다고 기사님이 에어컨을 좀 세게 튼 모양입니다."

아주머니는 입을 다물었다. 예상과 완전히 다른 반응에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오늘 많이 힘드셨나 봐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화난 아주머니를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가진 돈이 2만 원밖에 없는데, 이거 받으시고 내려서 택시 타고 편하게 가시죠."

그러며 그는 지갑에서 2만 원을 꺼내 정중히 건넸다. 그 손길에는 조급함이나 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소녀를 대하는 할아버지의 마음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했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듯했다. 그리고는 가제미처럼 그를 흘겨보더니 돈을 받아 들고 말없이 버스에서 내렸다. 마지막까지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소리치지는 않았다.

버스 문이 닫히자, 차 안에는 묘한 안도감이 흘렀다. 조선소 아저씨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 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내에게 감사의 표시를 했다. 그 사내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 일어난 일이 당연한 것이라는 듯이.

벌써 십 년도 넘은 기억이지만, 그 순간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 아저씨는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멋진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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