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철학
회전 초밥집은 선택 장애 환자에게는 일종의 고문실이다. 끝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를 보고 있자면, 마치 인생이라는 거대한 룰렛을 마주한 기분이 든다. 아내와 딸은 이미 자신들의 초밥을 집어 들었는데, 나는 여전히 "저 연어가 나을까, 아니면 새우가?" 하며 철학자 모드에 돌입해 있다.
선택 장애의 원인을 고민해 본적이 있다. 결론은 간단했다. 적은 재화로 최선의 결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 쉽게 말해, 3,000원도 아까운 가난한 마음이 만들어낸 정신적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선택 장애가 적다. 일반화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가 만난 부자들은 대부분 그랬다. 틀린 선택을 해도 다음에 또 선택하면 되니까.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다르다. 한 번의 선택이 곧 오늘의 점심 만족도를 좌우하고, 나아가 오후 업무 효율성까지 결정짓는다. 그러니 신중해질 수밖에.
문제는 이런 신중함이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만든다는 것이다. 아내는 이미 식사를 마치고 커피까지 주문했는데, 나는 여전히 "이 문어는 싱싱해 보이는가?" 하며 미식 평론가 흉내를 내고 있었다. 딸아이는 그런 아빠를 신기한듯 바라보며 자신의 다섯 번째 접시를 비우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내 부모님도 아마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자식에게 최선을 주고 싶은 마음, 제한된 자원으로 최대의 만족을 안겨주려는 노력. 그들의 헌신적인 사랑과 신중함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결과도 가져왔다.
결국 시간에 쫓겨 집은 것이 참치 군함 말이.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참치 군함 말이는 완벽한 선택이었다.
이때 깨달았다. 선택의 완벽함은 선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후의 만족에 있다는 것을. 아니, 더 정확히는 '이것이 완벽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능력에 있다는 것을.
딸을 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에게는 선택 장애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나이와 본분을 넘어선 풍요를 제공할 생각도 없다. 다만, 선택에 대한 건강한 태도는 물려주고 싶다. 그런 균형감을 줄 수 있을까?
아이가 자라서 메뉴판 앞에서 10분을 고민하거나, 편의점에서 과자 하나를 고르느라 진땀을 빼는 어른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 생각 없이 선택하는 무책임함도 경계해야 한다.
어쩌면 답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선택의 결과보다는 선택하는 과정을 즐기는 법을 가르치는 것. 3,000원짜리 초밥 하나에 인생을 거는 것이 아니라, 3,000원으로 살 수 있는 작은 행복을 찾는 눈을 기르는 것.
"아빠, 왜 그렇게 오래 생각해?" 딸의 순수한 질문이 귓가에 맴돈다. 아이의 눈에는 아빠의 고민이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맞다.
내 선택 장애는 어쩌면 선택의 소중함을 아는 것의 부작용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물려준 신중함이 과도하게 발달한 결과. 하지만 이제는 그 신중함을 지혜로 승화시킬 때가 되었다.
다음에 또 회전 초밥집에 간다면, 나는 좀 더 당당하게 첫 번째로 눈에 띄는 초밥을 집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만족할 것이다. 딸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완벽한 선택이 아니라 선택에 대한 만족하는 태도니까.
결국 중요한 건 선택이 아니라 선택 이후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참치 군함 말이가 완벽한 선택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이든 완벽할 수 있지 않을까?
아, 물론 그게 참치 군함 말이라면 더욱 좋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