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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비닐봉지 속의 '만종'

사유를 멈춘 세상에서 배려를 배우다

by 코나페소아


스마트폰 너머로 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스박스 안에서 터진 김치를 놓고 날 선 항의가 이어졌고, 고객센터에 신고하겠다는 협박과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의지가 목소리에 실려 끊임없이 밀려왔다.

배송을 하기 전 받은 상품의 외형을 꼼꼼히 점검한다. 특히 김치같이 국물이 흐르는 경우 다른 상품도 훼손시킬 수 있어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하지만 아이스박스 안에서 내용물이 훼손된 경우는 파악할 수 없다. 공손히 사과하고 상황을 설명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 높아진 목소리뿐이었다. 보낸 친정어머니가 포장을 잘못했을 리 없다며 막무가내다.

택배를 시작하던 초보 시절, 나는 친절한 택배기사가 되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결과는 늘 보상은 보상대로 내어주고 마음의 상처는 상처대로 받는 것이었다. 그날도 익숙한 상황에 이미 직감했다. 짧고 단호하게 대응해야 할 상황임을.

"고객센터에 신고하시고, 제가 더 이상 무엇을 해드려야 하나요?"

말문이 막힌 틈을 타 서둘러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불친절한 택배기사로 신고하겠다는 장문의 문자가 도착했다. 통화 내내 수화기 너머로 칭얼거리던 아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이에게 사랑을 주어야 할 엄마이자 누군가의 귀한 딸일 그녀지만, 그 순간만큼은 인간의 집요하고도 매섭게 악한 폭력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악이란 타고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고 판단하는 사유를 멈출 때 언제든 피어오를 수 있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악을 예방하는 힘은 뛰어난 지성이나 도덕적 학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성찰하는 일상적인 습관에서 온다고 했다. 배송하러 내린 사이 눌러놓은 층수 버튼을 모조리 지워버린 입주민도, 못 받았다고 전화해서 애간장을 태우게 하곤 상품을 찾았다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무심히 사라진 사람들도, 스스로를 잠깐 멈춰 세우고 타인의 자리에 서보는 습관이 없었을 것이다.

사유하기를 멈춘 그 얄팍한 순간들이, 소리도 없이 누군가의 하루를, 가슴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택배를 하면서 이 모든 것들이 날아오는 동안, 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법을 하나씩 배워갔다. 불평도, 협박도, 무심히 사라지는 사람들도 결국 내 운명과 상관없이 우연히 날아온 돌이자 이해 못 할 목소리들의 메아리일 뿐이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타이르기 시작했다. 욕망이 클수록 결핍도 깊어지고, 불행은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에서 온다는 사실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쓸모없는 감정소모를 줄이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만 바라보고, 삶의 간극을 받아들일 때, 내 마음속에는 힘겨운 체념으로부터 생겨나는 고요한 평화가 있었다. 알 수 없이 몰아치는 삶의 바람결을 따라 섬세하게 유영하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그것은 힘겹지도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우아하고, 자유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마음에 체념의 빗장을 걸고 살려는데,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배송 중에 시간에 쫓겨 고함을 치고, 마주치면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택배기사나 배달기사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인사를 나누고 농담을 주고받는 길 위의 동료로 변해 있었다. 그 살벌하던 처음의 모습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들도 결국 누군가의 착한 부모이고 자녀였다. 조금만 손해를 볼 것 같으면 돌변하는 그들의 모습이 어쩌면 자신의 불안을 다루는 서툰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말 한마디 없이도 함께 지쳐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고단함을 알아갔다. 더불어 사는 피로는 그렇게 마음과 마음 사이의 굳은 빗장을 서서히 풀어냈다. 공감이란 함께 하는 피로 속에 서서히 생겨났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지치는 게 아니라 서로를 향해 가면서 지쳐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날이었다. 들고 다니던 핸드카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청소 아주머니가 물끄러미 나의 핸드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을 적시는 빗물이 죄송해서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였다.

"비 오니깐 배송하기 더 힘들지요?"

그 한마디에, 타인을 향한 체념으로 빗장을 단단히 건 나의 마음이 그만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남겨 둔 채 내린 뒤에도 그 목소리가 뇌리에 맴돌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오랫동안 빗장을 걸어두었던 마음속 어딘가가, 그 짧은 한마디 앞에서 조용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택배를 하는 동안, 나는 얼마나 그런 말 한마디에 목말라 있었던 걸까. 가슴에 배려심을 가득 담고 일하는 청소 아주머니가 마냥 부러웠다.


삶을 윤택하게 하는 자본이란 돈이나 학식이 아니라 배려가 깃든 마음씨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빗물이 고인 핸드카트 앞에서 비로소 체감했다.


우리 집 출입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정면 거실 벽에 '밀레의 만종' 그림 액자를 걸어두었다.


그 그림 속 부부는 택배를 마치고 피곤에 젖어 들어서는 우리에게 감사와 평온한 감정을 다시 일깨워 주곤 했다. 택배라는 육체노동을 하면서 나는 그림 속에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했다. 황량하고 거친 경작지, 부부 곁에 놓인 쇠스랑, 한가득 짐이 실린 채 뉘어 있는 나무수레, 발아래 놓인 투박한 감자 바구니. 얼마나 고단하고 힘겨운 일상이었을까. 내가 택배라는 노동을 하지 않았다면 이들 부부의 고단함을, 그 가운데서 피워내는 감사함의 의미를 어떻게 공감할 수 있었을까.

그늘 진 곳 하나 없는 황량한 농토 위에서, 땀과 흙먼지로 얼룩진 부부의 남루한 옷깃 위로 황금빛 노을과 저 멀리 성당 첨탑 종소리가 은은하게 덮이는 그 순간, 땡볕으로 내리쬐던 것들과 수많은 빌런들로부터의 상처가 모두 사라지며 평온하고 감사한 기운만이 하나 가득 넘쳐흘렀다. 밀레는 바로 그 순간을 그리고 싶었으리라.

택배 하러 아내와 함께 출근하던 여느 아침이었다. 운전하던 택배차의 차창 속으로 눈부시게 밝은 황금빛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때마침, 포터 안에는 '크리스티나 트레인(Kristina Train)'이 부른 노래 〈Dark Black〉이 흐르고 있었다.

Dark black is the color of my life.

이별로 인한 상처로 이제는 짙은 블랙이 자기 인생의 색상이 되어버렸다는 서글픈 가사였지만, 청아하고 아름다운 음색과 음률이, 차창 밖에서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과 어우러지면서 그 광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우리는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곁에 앉은 아내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복감과 감사를 느꼈다.

우리가 남들에게 조금이든 많이 든 받기를 고대하는 순간, 저급한 '중력'이 생겨난다. 서로를 향한 팽팽한 압력이 작동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는 나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은총'처럼, 그저 주어지는 '선물' 같은 행복들도 존재했다.


마지막 배송지인 아파트에서 아들이 음료수와 간식이 담긴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다가왔다. 배송을 하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아들은 에어컨도 없는 무더운 복도 한편에 할머니가 홀로 서 계신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언제부터 서 계셨는지 알 수 없었다. 땀이 맺혔을 이마도, 부쩍 굽어진 허리도 아랑곳없이, 할머니는 그저 우리 가족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가족이 함께 택배를 한다는 것을 아셨는지 차가운 음료수 세 병을 챙겨 나오셨다고 했다. 비닐봉지를 건네시며 별말씀이 없으셨다고 했다. 그냥, 그저, 아들에게 내미셨던 거다.


아. 105동 302호 할머니.

아내가 아는 할머니였나 보다. 차가운 세 병의 음료수가 든 비닐봉지를 열어보면서 아내는 엄마가 생각난다며 가슴 뭉클해했다.


검은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그날 하루의 고단함을 덮어주는 작은 만종 소리 같았다. 바쁘게 배송하느라 사람들을 제대로 바라볼 틈도 없었는데, 그래도 우리를 지켜보며 관심을 베푸는 여리고 선한 마음과 손길이 있음이 참 감사했다. 우리가 잘못 배송한 상품을 아무 말 없이 제대로 옮겨주신 주민분들도 계셨다.


사악함과 부당함에 대한 뜨거운 분노와 울화가 가슴 가득 치밀어 오를 때면, 나는 이제 가만히 '은총' 같은 손길들을 떠올려본다. '은총' 앞에서는 그저 감사밖에 내가 할 수 없음을, 그리고 감사란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 마음속에 서늘하고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내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이제는 겸허하게 깨달았다.


삶 속에서 만종소리가 '은총'처럼 흩날릴 때면, 그저 멈춘 채 가만히 두 눈을 감고 감사해야 하는 순간이다. 악의 평범함이 소멸하기를 기원하면서. 그리고 젖어드는 행복을 은밀하고, 충만하게 마음껏 음미하는 시간이기도 하.


〈작가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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