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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주택총조사원의 하루

4번째 날


조사 4일째. 오늘도 저녁 6시, 남들이 퇴근할 시간에 나는 2부 출근을 한다.

'오늘은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다행히 오늘은 내가 사는 아파트, 나의 홈그라운드다.

옆동 조사를 시작하며 마음이 조금은 가볍다.


첫 번째 만남

승강기 안에서 나이 드신 분을 우연히 만났다.

그 층에서 함께 내려 조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앱으로 스마트폰을 열어드렸지만, 작은 화면에 작은 글씨들.

어르신께서 눈을 가늘게 뜨시며 화면을 들여다보신다.

나도 잘 안 보이는데, 어르신은 오죽하실까.

서둘러 태블릿으로 전환해 내가 직접 기록하기 시작했다.

"정말 고생이 많으시네요."

어르신의 따뜻한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성실하게 답변해 주시고, 나의 수고까지 알아봐 주시는 그 마음.

조사를 하다 알게 된 사실 하나. 이분이 봉담에서 골프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이란다.

아, 지나가다 봤던 그 큰 골프연습장! 이렇게 동네 이웃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구나.

'재밌네. 오늘은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아.'

첫 스타트가 좋았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두 번째 집, 의심의 벽

다음 집 초인종을 눌렀다. 온 가족이 나왔다.

QR코드를 보여드리자 가족들의 표정이 굳어진다.

첫날 문고리에 안내장도 달아드렸고, 우편물로 조사번호도 받으셨을 텐데.

하지만 요즘 세상이 워낙 무서운 세상 아닌가.

"악성 앱이 깔릴까 봐 걱정되는데요. 그냥 인터넷 주소로 접속할게요."

한참을 설명드리고, 의심을 풀어드리고 나니 진이 다 빠진다.

목에 걸린 조사원증도, 신분증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시대의 불신이 이렇게 높은 벽이 되어 서 있다.


세 번째 집, 무너진 신뢰

다음 집은 할머니께서 손주들을 돌보고 계셨다.

딸네 집에 오셨다가 조사원인 나를 만난 것이다.

"사위가 몇 년생이었지... 어디서 태어났더라..."

할머니께서 기억을 더듬으시는데, 안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오시더니 버럭 화를 내신다.

"대답하지 마! 직업, 근무처, 고향까지... 이런 깊은 정보를 나라가 알아서 뭐 하겠다는 거야!"

할머니는 예전에 통장을 하셨던 분이라 나를 이해해 주셨다.

계속 답해주시려 애쓰셨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썼던 정보 다 지워! 당장!"


할머니의 무안해하시는 얼굴. 그 표정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1층에서의 재회

1층 로비에서 그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관리사무소에 가보려고요. 신분 확인 좀 하려고."

할머니는 내 목에 걸린 조사원증을, 앞뒤 명찰을 꼼꼼히 살펴보셨다.


"저... 사실 이 아파트에 살고, 옆동 통장입니다.

관리사무소에 확인해 보세요."

그제야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집으로 돌아가셨다.


깨달음

나의 홈그라운드,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도 이런 의심을 받는다.

이곳 주민들과 얼굴을 마주치며 살아가는 내가, 옆동 통장인 내가 이런 대우를 받는데...

처음 이 일을 시작하는 일반 조사원들은 얼마나 힘들까.

아무도 모르는 동네에서,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곳에서 이 일을 한다는 것은.

문득 지난가을이 떠올랐다. 통장으로 600 가구가 넘는 집을 다니며 사인을 받던 그때.

그땐 그것도 힘들다고 투덜댔었는데.

"통장입니다" 하면 문을 열어주었다. 믿어주었다.


하지만 "통계청에서 나온 조사원입니다" 하면 문은 굳게 닫힌다. 무시당하기 일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겁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은 따뜻하다.

첫 번째 만났던 어르신의 "고생이 많으시네요" 한마디가, 할머니의 미안해하시던 눈빛이 계속 떠오른다.

누군가는 의심하고, 누군가는 화를 낸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내 수고를 알아봐 준다. 이해해 준다.

내일도 나는 저녁 6시, 남들이 퇴근할 시간에 출근할 것이다.

'내일은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무거운 마음과 함께, 작은 기대를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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