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 안에 할미꽃을 보고
봄이 오면 할미꽃이 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자줏빛 꽃잎을 오므린 채, 마치 뭔가 억울한 듯 땅을 내려다보며 핀다.
태어나자마자 할머니라 불린 꽃. 이름이 운명이 된 꽃.
생각해 보면 참 억울한 노릇이다.
갓 피어난 꽃봉오리인데, 이미 이름부터 늙었다.
누군가 처음 이 꽃을 보고 "어, 할미꽃이네" 했을 때, 그 꽃은 아직 봄의 한가운데였을 텐데.
설레는 첫 개화였을 텐데. 이름 하나가 그 꽃의 전 생애를 규정해 버렸다.
오늘 노인복지관에 다녀오는 길에 그 꽃을 봤다.
복지관 안에서 나는 3 시간을 보냈다.
손이 굳어 글씨를 쓰기 어려운 어르신들, 오늘이 몇 월인지 가끔 헷갈려하시는 어르신들, 그래도 웃음만큼은 정확한 어르신들.
그분들 사이에 앉아 있다 배식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마음이 좀 무거웠다. 내가 아직 저 문 안쪽 사람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언젠간 저 문 안쪽 사람이 될 거라는 불안감이 뒤섞인, 그 묘한 감정.
그 마음으로 할미꽃을 봤더니, 이상하게 이뻤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지 모른다.
꽃이라 하기엔 너무 수수하고, 색이라 하기엔 너무 칙칙하고, 자세라 하기엔 너무 구부러져 있다.
그런데 오늘따라 자꾸 눈이 갔다.
가만히 쪼그려 앉아 들여다봤다.
온몸을 덮은 흰 솜털, 안으로 오므린 꽃잎, 땅을 향한 시선.
이 꽃은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하늘을 보지 않고 땅을 보는 꽃. 자기가 뿌리내린 곳을 보는 꽃.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꽃이 억울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고.
전설이 있다.
할미꽃이 피는 자리에는 대개 슬픈 사연이 있다고.
손녀를 먼저 보내고 그 무덤가에서 울다 죽은 할머니가 꽃이 되었다고도 하고, 가난한 손녀가 굶어 죽은 할머니를 그 자리에 묻고 해마다 봄이면 찾아오다 자신도 그 곁에 묻혔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할미꽃이 핀 자리에는 누군가가 오래 기다렸거나, 오래 울었거나, 오래 사랑했다.
그러니 이 꽃이 고개를 숙이는 건 수치가 아닐 수 있다.
그 무게를 알기 때문일 수 있다.
나는 요즘 염색약을 자주 쓴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뭔가 들키는 기분이 든다.
나이가, 시간이, 피로가. 그래서 덮는다. 감춘다.
염색약 냄새가 화장실에 가득 차도록 꼼꼼하게 바른다.
그리고 거울을 다시 보며 안도한다. 조금 더 숨겼다고.
그런데 할미꽃은 숨기지 않는다. 흰 털을 그대로 드러낸 채 꽃을 피운다.
씨앗이 여물면 그 흰 털이 더 길어져, 바람에 흩날리며 더 멀리 퍼진다.
늙음이 오히려 씨앗을 날리는 힘이 된다.
나는 할미꽃이 억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억울했던 건 나였다.
나이 드는 것을 억울해하면서, 그걸 꽃에게 투영하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할머니 소리 들으면 얼마나 서럽겠냐고 혀를 차면서, 정작 자신의 흰머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건 나였다.
할미꽃은 땅을 보고 있었다. 자기 뿌리를 보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염색을 멈출 날이 올 것이다.
아니, 멈출 용기가 생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쯤엔 거울을 보면서 억울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흰 머리카락이 흰 솜털처럼 그냥, 나의 일부로 보일 수 있을까.
할미꽃이 이쁜 날이었다.
그 꽃을 예쁘다 느끼는 내가, 조금은 달라진 것 같은 날이기도 했다.
당당한 얼굴로 살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