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사라진 뒤 처음으로 사과를 깎았다.
사과를 깎는 건 주로 아빠의 일이었다. 내가 정신없이 저녁 먹은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려고 개수대로 다가가면 아이들은 어김없이 "사과 깎아 줘."라고 말했다. 그러면 나는 이제 막 빈백에 누워 쉬려고 하는 아빠를 향해 말했다. "할배. 사과 깎아주셔." 그러면 아빠는 휘적휘적 내 옆으로 다가와 썩썩 사과를 깎았다. 아빠는 나보다 훨씬 빠르고 얇게 사과 껍질을 깎았지만, 꼭 마지막 끄트머리가에 껍질을 조금 남겨 아이들의 타박을 받았다.
난 어릴 적부터 사과를 거의 깎아본 적이 없었다. 사과를 깎으려고 과도를 집어 들면 과도가 푹푹 손바닥을 향해 내리 꽂혔다. 그걸 아빠가 몇 번 본 후 내가 사과를 집어 들면 아빠는 "이리 내." 하고는 내 손에서 사과와 칼을 가져가시곤 했다. 언니는 뉴요커처럼 사과를 껍질째 통째로 먹는 걸 즐겼는데 껍질에 알러지가 있던 나는 꼭 누가 껍질을 깎아줘야지만 사과를 먹을 수 있었다. 나는 평생 아빠가 깎아주는 사과를 먹고 자랐다.
아빠의 마지막 등산 가방에도 끄트머리에 껍질이 조금씩 남아있는 사과가 들어 있었다. 세월이 오래돼 기스가 잔뜩 난 납작한 사각형 플라스틱 반찬통 안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사과 반 쪽. 그 반찬통을 열어 푸석한 사과를 입에 넣으려고 하자 곁에 있던 언니가 나를 말렸다.
- 그거 삼일이나 지난 건데, 먹지 마.
장례를 치르는 내내 사과는 아빠 가방 속에서 삼일을 있었다. 삼 일간 함께 있었던 컵라면과 보온병 속의 뜨거운 물. 보온병 뚜껑을 열어 물을 쏟아 버리는데 물이 아직도 뜨끈했다. 새벽같이 물을 전기보트에 끓여 그 보온병에 따라 넣고, 사과를 돌돌돌 깎아 반찬통에 넣었을 아빠를 생각하니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내 최초의 기억이 살아있던 유년시절 우리 집은 화홍문 위쪽에서 과일가게를 했다. 나는 과일 중 바나나를 제일 좋아했는데 그때 당시에는 한 개가 천 원가량 할 정도로 바나나는 귀한 과일이었다. 아빠는 늘 검게 무른 바나나를 나에게 주었는데, 그런 바나나는 껍질을 벗기기가 무섭게 옆으로 흐물떡 쓰러져 내렸다. 그런 바나나만 줄창 먹고 자란 까닭에 나는 바나나는 검게 되어야만 제대로 익은 거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난 어릴 적부터 복숭아 털 알레르기가 아주 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가 복숭아를 들고 지나가기만 해도 온 몸이 퉁퉁 부을 정도로 알러지 반응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런 나를 위해 아빠는 통조림 복숭아를 자주 사다주시고는 했다. 역시나 그 덕에 나는 복숭아는 통조림으로 맛본 황도와 백도가 그 세계의 전부라 믿었다. 과일가게 집 딸의 유년기 속에 과일을 풍족하게 먹었던 기억은 없다. 그 가게의 석유난로 냄새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코를 킁킁거리며 가게 안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를 뿐이다. 우리 아빠는 사과를 좋아했을까?
아빠가 가시고 난 뒤 오늘, 내가 처음 사과를 깎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과를 직접 깎아야 한다는 것도. 내일은 아빠의 49재날이다. 아빠가 좋아하던 음식 다섯 개를 준비해 아빠가 있는 잔디장 앞에서 작은 상을 차려보려고 한다. 사과는 그 다섯 개의 음식 안에 들어가게 될 과일이다. 아빠가 사과를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우리 집에 자주 사 오던 과일도 사과였고, 아빠의 마지막 등산 가방에 들어있던 과일도 사과였으니. 아빠는 사과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제는 아빠를 보내줄 수 있을까? 사과 하나를 깎으면서도 코가 시큰해지는데. 언제쯤 울지 않으면서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