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건 아픈 거고, 힘든 건 힘든 거야
구원을 갈망하는 일은 외로우면서 아프다.
우리는 의외로 예수, 부처가 아닌 그냥 사람이다.
자신을 무시한 구원의 노력은 언젠가 지쳐서 끝난다.
이런 관계가 있었다.
구원을 바라며 나 자신을 앞으로만 밀었던 관계.
정진하듯 누군가를 만나던 시절이었다.
나는 늘 말처럼 앞으로만 달렸고, 타인은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그가 원하는 방향, 그가 원하는 속도대로 나는 묵묵히 따라갔다.
그렇다고 내가 정말 인간의 지위를 내려놓았던 건 아니다. 다만, 그때의 나는 ‘내가 잘못했고, 그 잘못을 속죄해야 한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나를 깎아내리며 버텼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구조가 고착됐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혼자 해결해야 했던 시간들이 길어서인지
문제를 떠안는 것이 익숙했다.
“결국 내가 강해지면 해결된다”
“조금 더 버티면 된다”
이런 식의 정진 서사가 내 기본값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스컬그레이몬으로 변질된 아구몬이 폭주하다가 다시 알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 장면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넌 말이어도, 아픈 건 아픈 거다.”
“버틴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러면서 처음 받아들였다.
내 파트너는 내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상대가 일어날 의지가 없으면 그 손은 공중에 떠 있는 손일뿐이다. 내가 아무리 진화해서 폭풍을 막아줘도 그건 결국 상대의 문제를 대신 살아주는 일에 불과했다.
그 방식은 결국 나를 소진시키는 구조였다. 나는 천천히 힘이 빠졌다. 끝없이 진화를 반복하다가 결국 다시 알의 상태로 돌아갔다. 에너지가 바닥났던 것이다. 유한한 존재가 겪을 수밖에 없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때 알았다. 맹목적 헌신에는 끝이 있다는 걸.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걸. 누구도 타인을 구원하는 방식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걸.
진화, 구원, 희생… 이런 거대한 말들은 현실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 일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슴슴하게 흘러간다. 지금의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그때 그랬구나” 정도로 흐릿해진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구원 대신 독려,
희생 대신 관용,
몰입 대신 호흡이 더 필요하다고.
너무 강한 힘으로 붙들려하면 언젠가 부러진다. 모든 순간을 영화처럼 살 필요도 없다. 몰입보다는 관찰하고 지나가도 될 때도 있다. 누군가가 내 앞에서 영화를 찍어도 꼭 그 장르 안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그냥 라면 끓이고 TV를 보면 된다. 그건 도망이 아니라 회복이다. 내 힘을 다시 채우는 시간이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야 비로소 나는 다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구원하는 존재가 아닌 살아있는 존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