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는 어릴 적부터 삶이 쉽지 않았다.
아버지를 일찍 잃고, 맞벌이로 늘 바쁘던 어머니 곁에서 스스로를 챙기며 자랐다.
다른 아이들처럼 놀이터를 누비며 뛰어놀지 못했고,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라며 묵묵히 공부를 했다.
그녀에게 음악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5살 때 어머니의 권유로 피아노를 시작해 열두 살에는 스스로 기타를 독학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지만, 유나는 미래를 걱정하며 공부에만 집념했다.
그러나 그런 유나에게도 단 하나,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날이 있었다.
가을, 9월 29일. 그녀의 생일.
장난감을 사줄 형편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매년 그날만큼은 유나가 원하는 걸 마음껏 먹게 해 주고, 매번 산에 올라 커다란 단풍나무 아래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무에 기대어 단풍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유나는 그때만큼은 누구보다 밝게 웃었다.
하지만 어느 해 9월 29일, 단풍나무를 향해 오르던 그 길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났고, 유나는 어머니를 잃었다.
그날 이후 유나의 세상은 어둠이 깊게 내려앉았다.
웃음은 사라지고, 말수는 줄었으며, 삶을 이어가는 이유조차 흐릿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매년 자신의 생일이면 어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하러 산을 올라 단풍나무를 찾아갔다.
단풍을 보면 이제 기쁨보다는 슬픔이 느껴졌고.
그곳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도현은 유나와는 정반대였다.
항상 밝고 성실했고, 동네에서 한 번쯤은 꼭 튀는 “엄친아” 같은 존재였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고. 불량한 길을 철저히 피하며 누구보다 건강하게 살아왔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바르게만 흐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누가 머리를 짓누르듯 두통이 느껴져 병원이 가보니. ‘메모리아 소거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점점 기억을 잃고 1년이 지나면 모단 기억을 다 잃고 결국 죽는다는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도현은 세상이 자신을 배신한 것만 같았다.
그동안 누구보다 올곧게 살아왔는데, 정작 돌아온 것은 시한부 인생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방에 틀어박혀 문을 잠근 채로 구석에서 웅크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몇 시간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그동안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그는 방에서 나와 그대로 집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뛰고 또 뛰다가, 결국 발길은 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그 산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가 있었다.
사계절을 모두 품는 나무, 사계목.
봄에는 벚꽃나무가 되고, 여름이면 느티나무가 되며,
가을에는 붉은 단풍으로 물들며, 겨울이면 하얀 눈에 뒤덮인 소나무가 되는 기이한 나무.
그날은 가을, 9월 29일.
도현은 마지막 희망처럼 그 나무를 향해 걸었다.
나무 앞에 서자 모든 감정이 터져 나왔다.
그는 무릎을 꿇고 땅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왜 나야… 왜 하필 나야…!”
목울음 섞인 절규가 바람에 흩날렸다.
그리고 잠시 뒤 고개를 든 순간,
그는 자신보다 더 어둡고 더 상처 깊은 눈을 가진 소녀와 마주쳤다.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메말라 보이는 얼굴, 당장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은 가녀린 어깨. 유나였다.
이번 연도에도 9월 29일. 단풍나무를 찾아와 그곳에 기대어 생각에 잠겨있던 그날.
평소와는 달리 누군가가 나무에 찾아와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려 그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하자 바닥에 엎드린 채로 눈물을 흘리는 도현이 있었다.
도현은 당황해 유나를 올려다보며 그대로 몸이 굳었고.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이상한 공통점을 느꼈다.
거센 바람이 지나가 단풍잎을 흔들었다.
사계목의 붉은 잎들이 두 사람 사이로 흩어져 내렸다.
마치 나무가 그들의 만남을 허락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을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