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 우주사이

by 책마법

l오늘도 허리를 숙이고 깨진 병 조각들을 주우며 거실을 정리했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지친 아버지는 소파에서 축 늘어져 코까지 골며 잠에 들어 있었다. 조각들을 쓰레기통 안에 넣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일정하게 코를 골고 있는 아버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매일 이 시간이 되면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소파에 앉아 술을 왕창 들이켜고, 빈 병을 TV가 세워져 있는 벽을 향해 내던진다.


그리고 무릎에 팔꿈치를 두고 손바닥으로 눈가를 짓누르며 한참을 소리 내어 울다가 다시 눈물을 그치고, 소파 손잡이에 머리를 기대어 잠에 든다.

나는 그가 잠에 들면 까치발을 들고 조심히, 발소리가 나지 않게 TV 쪽으로 걸어가 깨진 조각들을 쓰레기통에 넣는다.


게임 미션처럼 간단하고도 스릴 넘치지만, 잠귀가 밝은 아버지는 작은 소음이라 할지라도 거슬리면 잠에서 깨어나 조각들을 치우고 있는 내게 발길질을 하며 마구 화를 낸다. 그럴 때마다 술을 마시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지지만, 다음 날 다시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면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 잠시 방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조각을 치우던 어느 날,


아버지가 점점 내게 폭력을 사용했다.

술을 마시고 거실 바닥에 술병을 내려놓은 뒤, 내 방으로 들어가 바닥에 웅크려 앉아 그가 잠에 들 때까지 기다리던 내게 다가와 발길질을 하며 화를 냈다. 손으로 얼굴을 막으며 뼈가 부러질 듯한 고통을 참아냈다. 팔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나는 곧바로 내가 오늘 무엇을 잘못했는지부터 찾았다.

나는 오늘 그의 심기를 건드린 적이 없는데, 평소와 똑같았는데 왜 나를 때리는지 의문이 생기고 눈앞에 있는 그에게 분노가 쌓여 갔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분노는 사그라들었고, 죽음에 대한 공포만이 나를 집어삼켰다.


한동안 발길질과 주먹을 날리던 아버지는 진정이 되었는지 시체처럼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나를 두고 다시 소파로 걸어가며, 거실 바닥에 세워 둔 술병을 내가 있는 방을 향해 던지고 잠을 자려는 듯 소파에 누웠다. 술병은 내 방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하고 벽에 맞고 깨졌다.


잠시 집 안에 정적이 흐르다 일정한 코골이가 들려오자, 조심히 깨진 조각들을 쓰레기통에 넣어 치웠다. 그 뒤로 폭력은 더 심해졌고, 나는 멍 자국과 상처들을 안고 살아야 했다.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술이 다 떨어져 집을 나가 마트로 가는 아버지가 집 안에 없는 틈을 타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스마트폰도, 장난감도 없어 챙길 것이 없는 빈손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혹시라도 우연히 집으로 올라가던 아버지와 마주칠지도 모르기에 계단으로 내려가 아파트를 벗어났다.

세상은 집 안보다 생각 이상으로 넓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저 앞으로 달렸다.

이렇게나 달려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종아리도 저려 오고 숨이 막혀 왔다. 얼마 못 가 가쁜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가슴에 손을 얹자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가 근처에 있는지 주위를 살피며 그를 찾았지만, 다행히도 아직 아파트 근처까지는 못 온 듯했다.


다시 달리려고 발을 뻗은 순간, 튀어나와 있는 보도블록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아야!” 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진 나는 쉴 틈 없이 상체를 일으켜 넘어져 생긴 상처들을 살폈다.

팔꿈치와 무릎이 찢어져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지만,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 해서 마음이 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상처 난 몸을 이끌고 일어나려던 순간, 무릎에서 피가 났던 오른발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았다. 곧 아버지가 올 텐데,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최악이었다.


이렇게 아버지에게 집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들켜 또 엄청나게 맞겠지? 이번엔 얼굴을 막지 말고 팔꿈치랑 무릎을 손으로 가려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며 망연자실하던 내 앞에 누군가가 손을 건넸다.


고개를 들어 그 손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손은 조금도 떨고 있지 않았고 미동도 없었다. 나를 일으켜 세우려는 건지, 아니면 그냥 넘어지지 말라는 신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하나의 빛줄기로 보고 구원으로 생각해 손을 잡았다.


손을 잡자 눈앞에 있던 사람이 내 손을 들어 올리며 내 몸을 일으켜 주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아버지도 낫겠지라는 희망을 품고 그를 따라갔다.

사랑을 못 받아 색깔을 모르던 소년에게 먹물은 충분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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