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생각
토요일, 오전수업만 마치고 서둘러 버스를 탔는데도 벌써 오후 세시다.
부슬거리는 가을비가 내리는 시외버스 터미널엔
우산 없이 부대끼는 사람들이 제각기 갈 곳만 바라본다.
새로 장만한 긴 끈의 네모 회색 책가방이 젖을까
소중히 끌어안는다.
이런 날엔 시외버스 터미널 뒤편으로 빠져나가야 한다는 걸 안다. 용감하게 터미널 앞문으로 빠져나간다면, 잠시동안은 아스팔트를 밟고 걸을 수는 있겠지만 건물 처마를 두고 다투는 사람들에게 나는 보기 좋게 밀려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외버스 터미널 뒤편은 비에 젖은 흙길이다.
조심스럽게 한 발을 디뎌본다. 비에 젖어 미끄럽기는 하지만 아직은 단단한 흙길이다. 조금 더 비가 온다면 흙죽이 될 테지만 말이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길을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대견하다. 조금 걷다 보면 시장이 나온다. 오늘은 장날이 아니라 얼기설기 시퍼런 천막을 덮어쓰고 있는 문 닫은 철물점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엔 김이 잔뜩 서린 유리문을 꼭 닫은 장터국숫집이 나온다. 그 유리창에 낙서를 하고 싶은 마음에 입가엔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국숫집 모퉁이를 끼고돌면 우시장이다. 장날 소들이 주인에게 끌려 나와 묶여있는 나무 울타리는 비를 맞고 한가하다. 귀 기울여 들어봐도 알아듣지 못할 술에 취한 아저씨들의 악다구니도 오늘은 없다. 넓은 우시장을 가로지르면 좁은 골목을 끼고 양쪽으로 아슬 거리게 늘어선 선술집과 국밥집이 있다. 그 국밥집은 맛이 기막힌 국밥을 판다. 장날엔 앉을자리도 없지만 오늘은 국밥집 아주머니가 문 앞에 의자를 끌고 나와 앉아 담배를 피우고 계신다.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치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린다.
" 안녕하세요?"
" 오야.. 학교 마치 겨? 인사성도 참 밝지.."
그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면 우체국 앞마당이다.
그러면 고개를 숙여 땅을 봐야 한다. 그래야 나이가 천년은 됐을법한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나무잎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나 바닥은 노란색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폭신해 보인다. 은행나무는 껍데기가 홀딱 벗겨진 채로 엷은 회색빛을 띄고 있다. 하지만 나무 두께는 내가 여태껏 봤던 그 어떤 나무보다도 엄청나다. 대단하다. 어른 세 명이 달라붙어 팔을 벌려도 다 감싸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우체국 마당에 들어서며 그 폭신하고 노란 양탄자위에서 은행알을 밟지 않게 조심스럽게 쪼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제일 튼튼하고 잘 생겨 보이는 노란 은행잎을 골라낸다. 그리고 제일 작고 귀여운 은행잎을 다음으로 골라본다. 그리고 책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은행잎의 물기를 닦아낸다. 그리고 두꺼운 국어책을 꺼내 잘생긴 놈 먼저 책 중간에 끼워 넣는다. 그리고 귀여운 녀석은 책장 맨 앞에 끼워두고 다시 책가방에 책을 넣어둔다.
우체국 앞마당 한쪽엔 일을 일찍 마친 우체부 아저씨의 자전거가 비를 맞고 서 있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우체국 계단엔 베고니아 화분은 없지만, 빨간 사루비아가 심어진 둥근 화분이 놓여있다. 그 빨간 사루비아는 이제 몇 개의 꽃만 달려있고 꽃대만 남아있다.
그 계단을 톡톡 거리며 올라 우체국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다. 얼마 전 우체국에 취직이 되어 일을 시작한 원정이 언니가 왼쪽 맨 끝자리에 서서 배시시 웃어준다. 원정 언니는 우리 동네에 산다.
" 비 맞고 온 거야?"
언니는 몇 회 기념인지도 모를 우체국 창립기념 수건을 꺼내 건넨다.
" 응.. 언제 끝나?"
언니는 벽에 세워진 커다란 자명종 시계를 쳐다보며 말한다.
" 좀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릴래?"
" 아니야.. 비가 와서 그냥 이쪽 길로 와 봤어.."
" 기다려..끝나면 우리 같이 칼국수 먹고 가게.."
우체국 안엔 손님도 없다. 남자 직원 몇 명도 토요일 오후 퇴근시간을 기다리며 비 내리는 유리창으로 밖만 내다본다. 그러다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아저씨 한분이 원정언니에게 그만 퇴근해도 좋다고 하신다. 언니와 나는 눈을 마주치며 좋아라 웃는다.
그 아저씨가 내어주신 우산하나에 원정언니와 나는 팔짱을 끼고 여느 때처럼 깔깔거리며 다시 큰길로 나가 시외버스 터미널 앞으로 돌아왔다. 칼칼한 칼국수를 먹기 위해서다. 터미널 앞에 도착하니 무척이나 눈에 익은 차 한 대가 보인다. 아빠차다. 비가 오니 마중을 나오신 거다. 나를 보시고 차에서 내려 다가오신다. 원정언니와 나를 보신 아빠가 하나도 무섭지 않게 눈을 흘기신다.
" 늦어서 걱정했잖아"
아빠도 우리와 같이 맛있고 칼칼한 칼국수를 드셨다.. 그리고 아빠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고 보니 마당엔 엄마가 걸어둔 커다란 솥이 김을 펄펄내며 끓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밀가루 반죽을 열심히 밀고 계셨다. 저녁은 내가 좋아하는 칼국수라고 하신다. 비도 오니까..
아빠와 나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예약기능이 있다해서 써 봅니다.
천연색의 기억은 아닙니다. 기억은 언제나 색바랜 회색같습니다. 어릴적 내 책가방같이, 그리고 은행나무처럼..눈을 감으니 기억속의 어린 내가 지금도 고향 우체국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은행잎을 고르고 있을것만 같습니다.
비 오는 호주 가을 날씨가 딱 그날을 떠 오르게 합니다. 그 때의 바랜 기억을 오늘에서야 써 보았습니다. 눈물나게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