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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산드라 Dec 30. 2021

반도

   * 스포일러 있습니다.

반도(2020)

사실 나는 전작인 '부산행'을 정말 괴로워하면서 보았다. 공유 우는 모습은 좀 좋았는데... 그것 빼고는 나에게는 남는 게 없는 영화였다. 너무 뻔한 상징적 인물들, 너무 뻔한 갈등, 너무 뻔한 신파, 너무 뻔한 주제. 그래서 속편인 '반도'는 정말이지 볼 생각이 1도 없었는데 어느날 강동원을 보고 싶어서 + 네이버시리즈에서 공짜로 다운 가능하길래 보게 되었다. 그런데 웬걸, 의외로 아포칼립스가 된 서울을 보는 것이 정말 오락적 재미가 있더라. 물론 '반도'도 뻔한 신파적 연출과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여성 캐릭터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어린 여성을 이렇게 사용하는 한국 영화는 흔치 않은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만나보게 되어서 반가웠다. 그래서 지인에게 '반도'가 생각보다 재미있다고 추천했더니, 지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인데 좀비로 변했다는 이유만으로 오락적으로 사람을 학살하는 좀비물이 싫어요." 아차. 그렇지. 생각해보니 나도 똑같은 이유로 좀비물을 싫어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 나는 '좀비권' 옹호자다. 이 말을 듣고서 사람들은 웃고는 하는데, 나는 진지하다. 여기서 사회의 구성원에서 배제된 약자에 대한 인권적 연대가 시작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먼저 본 좀비물은 '워킹데드'였는데, 분명히 인간이었던 사람들인데 좀비가 되었다는 이유로 무차별하게 살상해도 되는가? 라는 지점에서 불편감과 위화감을 느껴서 1화를 보고 꺼버렸었다. 좀 더 내 불편감과 위화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면, 좀비가 되었다는 것도 어찌보면 병에 감염되었다는 뜻인데, 모든 좀비물에서는 이 질병자들을 치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 취급하며 무차별 사살한다. 그 이유는 '질병자들이 비질병인들에 대하여 너무나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다. 대부분의 좀비물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하지 않고 '비질병인', 즉 '정상인'과의 갈등 상황 제시에만 소모품으로 쓰인다. 그런 내가 좀비물을 간간이 보기 시작한 것은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 Z'를 너무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꿈에서 좀비한테 쫓기면서도 책을 완독하고 난 이후이다. (영화도 있는데 영화는 이 재미있는 소설을 너무 뻔한 이야기로 만들어버려서 재미가 1도 없다.) 그리고 영화를 많이 보기 시작하면서 '좀비물'이라는 장르 설정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매너리즘이다. 5년 전에는 매트릭스도 비판적으로 포스트휴머니즘적 기계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보면 와 저거 카메라 뭐 썼지 어떻게 편집하고 연출한 거지, 뭐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을 거다. 반성합니다...


좀비 장르의 시초나 다름없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보고 처음 좀비 영화란 이렇게 재미있고 멋있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 영화에서 등장한 좀비는 시체 뱀파이어 같은 느낌이었고(실제로 영화를 처음 구상할 때도 좀비라는 명확한 설정이 없었기 때문에 감독도 시체 뱀파이어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좀비에 대한 설정들은 이후 창작물들에서 하나씩 쌓이기 시작했다.), 그 영화의 매력은 '우리 중 누가 좀비인지 우리는 모른다', '기를 쓰고 지켜낸 소중한 사람이 사실 좀비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같은 트릭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초기 영화다보니까 좀비 바이러스 감염으로부터 사람이 좀비가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설정이 있어서 나올 수 있는 트릭 포인트가 아닐까? '28일 후'같은 영화를 보면, 이 영화 이후로 좀비들이 다 죽자사자 달리기 시작했다는데, 좀비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가자마자 사람이 곧바로 좀비로 변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사람을 죽이는 장면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좀비 장르도 점점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인류애와 좀비권을 잃어가는 방향으로만 변해가는 것 같지는 않다. 'cargo'라는 영화를 보면 (단편으로 만들었다가 대히트를 쳐서 장편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아이를 등에 업고, 자신의 두 손을 묶고, 아이를 먹지 않도록 눈 앞에 고깃덩어리를 매달아 놓고서 좀비가 된 채로 걸어간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 아이를 발견하고 구해주고, 좀비가 된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서 땅에 묻어준다. '부산행'에서도 사람들이 고구마라고 욕한 부분이지만, 예수정 배우가 자신의 친구가 좀비가 된 모습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리며 문을 열어주고 자신은 좀비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은 나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장면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구마라고 욕했다는 것이 나는 더 생각해볼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워킹데드가 사람들을 많이 망쳐놨어...


좀비권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다보면 언캐니밸리와 동물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언캐니밸리는 어떤 것이 인간을 닮으면 닮을수록 인간이 그에 대해서 친근감을 느끼다가, 너무너무 닮은 순간, 그러나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불편감과 공포감을 느끼는 그 계곡을 말한다. 트위터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공포감을 느끼도록 진화한 것인가? 우리와 너무나도 닮았지만 우리는 아닌 그것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식으로 괴담이 돌고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글쎄... 나는 딱히 그런 괴담을 나누며 오싹해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이건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피하려는 '비질병인'들의 행동면역체계, 심리적 면역 체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게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고.


세상엔 좀비 바이러스가 없더라도 병원균의 역사가 유구하다. 흑사병, 스페인 독감, 천연두, 그리고 최근에는 사스, 에볼라, 메르스, 코로나 19... 병원균에 맞서서 인간은 신체적 면역 체계와 더불어 심리적 면역 체계도 진화시켜 왔다고 사회생태심리학은 말한다. 이건 병원균에 노출되지 않도록 우리의 사고, 정서, 행동을 조절하는 일종의 심리적 방어 체계를 말한다. 이런 행동 면역체계가 잘 발달한 인간일수록 더 진화과정에서 잘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체계가 잘 작동한다는 건, 병균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외형적 단서(콧물, 기침, 피부 반점 등)뿐만 아니라 정말정말 미묘한 단서들(얼굴 안색, 걸음걸이, 냄새 등)까지 빠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 인한 단점들은 당연히 행동면역체계가 오경보를 일으켰을 때, 과일반화 될 때의 사례들이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아니라, 전염병과 관련 없는 외형적인 이상징후 만으로도 집단에서 배척하려는 경향이 높아지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동성애자, 비만인구, 노인, 장애인 등. 그리고 역사적으로 전염병이 많이 돌았던 곳에서는 집단주의적 지수가 더 높게 나타나고 개인주의 지수는 더 낮게 나타난다. 병원균의 위험을 강조하는 슬라이드를 본 백인 학생은 같은 백인 스코틀랜드 학생보다 나이지리아 흑인 학생을 더 배척하는 외부인 혐오증을 보이고, 임신한 여성들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같은 국가 국민들을 외국인보다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외에도 병원균이 더 많이 유행했던 곳에서 기존 규범에 순응하는 태도, 권위주의적 태도, 보수적 정치 성향, 강악접 정부 정책에 대한 찬성 태도 모두 높은 경향을 보인다. 좀 무시무시하다.


그렇다고 나는 '그렇기 때문에 이건 당연히 진화적으로 발달해온 행동면역체계라서 우리가 너희를 차별하는 것은 옳다'라고 말하는 건 또 다른 문제라고 여긴다. 앞에 나열한 사실들은 과학적 인과관계, 상관관계를 밝힌 것이고 인과관계나 상관관계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 사실에 당위성이 있지는 않다. 앞의 사실들은 "진화적으로 행동면역체계는 이렇게 발전해왔다"는 것이고, 당위의 문제는 "진화적으로 행동면역체계는 이렇게 발전해다. 이것은 옳다/그르다."여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과학적 인과관계나 상관관계가 당위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은 100도씨에서 끓는다."는 과학적 인과관계가 "물은 100도씨에서 끓는 것이 옳다."라는 당위가 되어버린다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50도씨에 물을 끓인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는 당위가 아니고, 특히 사회과학에 있어서 인간은 끊임없이 진보해나가는 존재라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은 아포칼립스를 상상할 때 완전한 타자로 좀비를 상상하지만, 사실 기존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좀비는 생각해보면 우리 곁에 늘 있다. 퀴어, 외국인, 장애인, 성노동자... 셀 수도 없이 많다. 장르적 재미를 빼고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우리는 좀비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코로나 19 상황이 닥치면서 세상이 망해가는 과정은 영화처럼 극적이고 한순간인게 아니라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반응들이 많았다. 누군가에게는 코로나 19 상황이 닥쳐서야 지루하고 재미없게 세상이 무너져내리고 있지만,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누군가에게는 평생이 지루하고 재미 없게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중일 것이다. 그걸 이해할 수 있다면, 사회도 한 발짝 더 진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동물권! 이건 다큐멘터리 '쇼아'와도 연관을 지어서 이야기하고 싶다. 아직 절반인 4시간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 4시간동안의 내용은 명확하다. 어떻게 이성적이고 효율적으로 학살을 저질렀나. 보면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이 떠올랐는데, 호모 사케르는 희생당해도(죽어도) 그를 죽인 사람이 면책받는 자를 말한다. 그리고 아감벤은 주체는 호모사케르를 희생시킴으로써 권력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좀비물에서는 좀비가 호모사케르인 셈이다. 비감염인들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좀비가 희생되고, 비감염인들은 그 일에 대해 면책받으니까. '쇼아'에서는 호모사케르가 되어서 죽어나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대한 증언이 나와있다. 그 중에 전 SS대원의 말이 정말 의미심장했다. "아우슈비츠는 완전히 공장이었지요. 이걸 기억하십시오. 트레블링카는 아주 원시적이었지만 효율적인 살인공장이었습니다."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교과서적인 예시 문장이다. 그런데 이걸 살'인'공장이 아니라 살'해'공장으로 단어를 바꾼다면, 그건 현대의 공장제 도축 시스템과 똑같지 않은가? 효율적으로 가둬서 기르고(게토), 빨리 단시간에 많이 죽이고(도축장). 그래서 든 생각인데, 그렇게 비인간동물들을 희생시켜도 인간동물이 면책받음으로써 인간동물이 종에서 최고의 권력을 유지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반도'에 등장하는 한 장면처럼, 몸에 숫자가 쓰여진 '들개'라고 불리는 인간과,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좀비들을 맞붙여 싸우는--희생시키는 콜로세움을 만들고서도 그 행위에 대해 면책받지 않는 주체들, '주연들'처럼.


반도(2020) 이 장면은 '이스케이프 프롬 뉴욕(1981)'의 오마주이다

만약 어느날 동물들이 '주체'가 되겠다고 나서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더 이상 우리를 희생시키는 것에 대하여 너희에게 주어지는 면책권은 없다고 들고 일어난다면? 그렇다면 정말 인간의 입장에서는 아포칼립스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동물은 비인간동물을 희생시킴으로써 어떻게 보면 '진격의 거인'같은 상황을 겪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면책받는 사유는, (여러가지 진화적 인과관계들을 근거로 대고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것이 당위가 되지는 않는다.)아무래도 다름, 눈에 보이는 '다르게 생김'이 아닐까? 나는 어떤 장애인 동물권 활동가분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자신과 뒤를 돌아볼 수도 없는 공장식 사육 철창 안에서 자라는 소는 같은 질병을 앓고 있다는 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소 또한 현대의 공장제 사육 및 도축 시스템에 의해 장애가 생겼기 때문에 장애권 운동과 동물권 운동은 연결되어 있다는 글이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할 때면, 다른 장애인이나 장애인의 부모가 와서 "스스로를 동물 취급 하지 말라"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라는 소설에서도 다뤄지고 있고, 계속해서 장애인들이 외치는 것처럼 우리는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구호일 테고, 그건 장애인에게 천부인권을 포함한 인간의 존엄성이 있음을 알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라는 소리일 테다. 동물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 권리가 인간동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동물에게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어려운 문제다.


여하간 세상에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크아아악하는 좀비'가 없다 뿐이지, 은유적인 좀비는 많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비척비척 살아가는 좀비들이 괜찮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좀 비척비척 살아가고, 다르게 살아가도 괜찮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도 좀비권을 외친다. 세상의 모든 좀비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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