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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산드라 Dec 30. 2021

버드 박스

* 스포일러 있습니다

버드 박스(2018)

버드 박스는 영화가 나온 시점과 미국 사회를 함께 생각하면 그 사회학적 위치가 아주 특이한 영화다. 영화는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다루고 있는데 그 설정이 다른 아포칼립스 영화들과는 좀 다르고 신선한 점이 있어서 설정에 어떤 함의를 두었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냥 신선한 설정일 뿐... 별로 감독이 몰래 숨겨놓은 의미 같은 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감독이 힘을 쏟은 부분은 다양성을 기치로 내건 대안가족 공동체를 만들고 묘사하려는 부분인 것 같다. 그런데 감독이 신선한 발상으로 떠올린 '정신 이상'으로 인한 아포칼립스라는 설정이 메타적으로, 영화 외적인 사회적 요소까지 고려하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의 아포칼립스 설정은 간단하게 세 마디로 요약된다. 1) 무언가를 보면 정신 이상이 되어 스스로 자살이나 자해를 하는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미지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 2)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을 가려야만 한다. 3) 애초부터 정신 이상이었던 사람들은 그 무언가를 보고도 자살이나 자해를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눈을 가린 사람들의 안대를 풀어내려고 강제한다. 이 세 가지 설정이 미국의 공포영화에서 나왔다는 점은, 공포물에서 공포의 대상이 흔히 메타적으로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때, 트럼프의 시대를 겪고 있는 미국 사회를 묘사하고 있고 나타나는 공포심은 트럼프의 시대를 겪은 진보 진영의 공포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트럼프의 시대를 겪으면서 '이성적'이라는 말과 '인권적'이라는 말이 하나의 키워드로 뭉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과 차별되는 인권적임을 말하려다보니 '이성적'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진보 진영에서는 노마스크로 시위를 벌이는 트럼프 지지자를 향해 '미쳤다'라고 하지 않는가? 최근에 트럼프의 '정신 이상'을 증언하는 책이 나온 것도 기억이 나는 대목이다. 미셸 오바마가 힐러리 지지 연설을 할 때 'when they go low, we go high'라는 표어를 만들어냈고 이것은 진보 진영에서 열렬한 환호를 이끌어냈지만 잘 뜯어보면 이것은 배제를 담고 있는 실패한 표어다. 결국 이 말은 '이성적인 high한 제정신인 사람들'만을 공동체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에는 정신질환을 가진, 불안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살고 있다. 그들도 욕망하는 것이 있고,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 결국 힐러리는 졌고 이 표어는 어떤 의미로 정치적으로도 인권적으로도 실패했다. 인권이라는 것은 low한 사람들까지 다 공동체의 성원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다루어지는 공포와 비슷하면서도 대척점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다루어지는 공포는 급격히 변화하는 세대적 가치에 대한 기성세대의 불가해에 기인한 공포이다. 노인(으로 대표되는 old한 가치)들의 젊은 세대(로 대표되는 new한 가치)에 대한 공포인 셈이다. 결국 이에 반항하는 노인의 가치(make America great 'again')가 트럼프를 당선시켰다. 반면 '버드 박스'의 공포는 이 노인의 가치에 대한 불가해에 기인한 공포이다. 그 공포의 방식은 '저 사람 미쳤어'로 흘러간다. new한 가치의 입장에서 볼 때 이성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성적이라면 인권적이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역으로도 당위성을 얻게 된다. 인권적이려면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새로운 이성적인 사람들만의 대안가족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진보진영이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공동체인가? 이 점에서 나는 의문을 제기한다. 어떤 사람들이 '정신 이상'이고 '미친'것처럼 보인다면, 그 사람들은 왜 '미쳤'는가? 나는 요즘 비판정신의학을 접하고 공부하고 있는데, 정신 질환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을 보고 '미쳤다'라고 하는 것은 온전히 그 사람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정상 규범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1851년 사무엘 A. 카트라이트는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이 자꾸만 탈출하려는 경향을 드라페토매니아(Drapetomania)라는 정신병으로 설명했다. 그는 이 병에 가장 잘 듣는 치료가 호된 채찍질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문은 루이지애나 의사협회에 제출된 논문이다. 현대엔 어떠한가? 인종의 진단과 상관성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흑인 환자는 백인 환자보다 정신병적 장애로 진단 될 가능성이 3, 4배 높다. 마찬가지로, 라틴 아메리카계 및 히스패닉 환자들이 정신병적 장애로 진단 받을 가능성은 3배가 더 높다. 영국의 연구에서는 아프로 카리브해 이민자들과 그들의 자손들 사이에서 정신병 진단율이 높다고 보고되었는데, 그들이 이주하기 전에 살았던 본국에서는 정신병 진단율이 높지 않았다. 현재는 이들에게 치료로 호된 채찍질을 하지는 않지만 정신질환의 진단기준과 치료방법을 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있는 APA(America Psychologcial Association)는 제약회사의 거대한 로비를 받고 새로운 정신질환을 끊임없이 추가시키며, 제약회사는 사회생태학적 고려가 필요한 환자군에게 약 한 알만 먹으면 만사가 다 해결될 것 처럼 약을 팔아치우고 있다.


정신 질환에는 사회생태학적 고려가 필요하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모두 정신질환자인 것은 아니겠지만, 진보 진영은 그들을 보고 '미쳤다'라고 묘사한다. 왜냐하면 진보 진영에서 내세우는 정상 사회규범을 어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진보 진영은 거기까지 고려를 해야 한다. 미쳤다는 이유로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은 제 발등 찍기인 전략이다. 왜냐하면 '미친 사람들'은 진보 진영에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수자 집단에 더더욱. 민주당이 트럼프를 보고 미쳤고 정신 이상자라고 낙인 찍을 때, 정신 질환 판정을 받은 소수자 집단이 함께 낙인 찍힌다. 음침하거나 혼란하거나 정신 이상인 소수자들은 이성적이고 high한 진보 인권 진영의 신화를 거짓으로 만들기 때문에 기피 대상이 된다. 이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말했듯, 기득권 남성이 소수자인 여성이나 아이에게 억지 웃음을 요구하고 그것을 귀여워함으로써 억압이 나타나는 현상과 닮아있다. 당당하고 수퍼 우먼이어야만 페미니스트인 것처럼 진보 의제를 짤 때,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위축되어 있으며 소심한 여성은 페미니스트 취급을 받지 못한다. 그 '나약함'에서 벗어나라는 압박을 받는다. 그것 또한 억압이다. 진보 진영은 그렇게 기득권 중심의 인권을 외치게 되는 것이다. 보기 좋고, 멋진 사람들의. 그러나 그것은 인권적이지 않다. 트럼프는 '정신 이상'으로 비판받는 것이 아니라 '비윤리적'인 지점으로 비판받아야 한다. 트럼프는 분명한 기득권이지만 정신질환자 그룹에 있어서는 트럼프 또한 소수자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야 인권을 논하는 담론의 장은 한 발짝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기득권이 아닌 정신질환자들 또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결론. '비윤리'와 '정신질환'을 한 데 묶지 말 것. 불가해의 대상이라고 함부로 '미쳤다'고 말하기 전에 그가 그렇게 된 사회생태학적 이유를 살펴볼 것.


버드 박스(2018)

영화 내적인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번엔 산드라 블록의 어머니상에 대해서 말해보자. 영화의 첫 장면은 산드라 블록이 아이들에게 '강력한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다. 이런 '강력한 명령을 내리는 어머니상'이 존재하고, 아이들이 이런 어머니의 말을 듣는 장면이 존재할 수 있고, 미국 관객이 이 장면을 수용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미국이 총기합법인 나라라서 그런게 아닌가 싶었다. 한국과 달리 위험 상황, 위험 지역에서 부모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정말 죽는 사태가 발생하니까. 반명 한국에서 이런 명령을 따르는 자녀 상이 쉽사리 받아들여질까 싶다. 당장 생각나는 한국 영화 '거인'만 해도 자녀는 무책임한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마지막에는 모든 억압에서 떠나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명령을 내리는 강력한 어머니상도 받아들여지기는 할까? 그나마 '강력한 어머니상'을 보여주는 영화로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가 있는데 이 어머니는 아들의 제멋대로인 행동을 달래면서 따라가기 바쁘다. (아들이라서 그런가... 만약 딸이었다면 좀 달랐을까.) 여하간 한국인 관객이 이러한 극도로 권위주의적인 양육 방식을 볼 때 약간의 위화감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


미국에서 흑인 가정의 경우에는 부모의 권위주의적 양육방식(authoritarian)이 권위적 양육방식(authoritative)보다 자녀의 사회 적응 수준이 높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권위주의적 양육과 권위적 양육이 무슨 차이인가 싶을 텐데, 권위적 양육방식은 통제도 하고 따뜻함도 주는 것, 권위주의적 양육방식은 통제는 높은데 따뜻함은 낮은 것이다. 백인 가정과 다르게 흑인 가정에서 권위주의적 양육방식이 더 적응수준이 높았던 이유는, 흑인 가정이 더 빈곤하고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경우에 부모의 명령을 따를 때에 더 안전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산드라 블록의 양육방식은 처음에는 권위주의적이다. 왜냐하면 트럼프로 대표되는 사회의 old한 가치가 불가해하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안가족 속에서--트럼프가 사라진 곳에서--산드라 블록의 양육 방식은 권위적으로 변한다. 아이들을 '마음놓고 키울 수 잇는 안전한 환경'이 된 것이다. 이것은 미국에서 트럼프 시대에 진보적 부모가 겪었던 일을 나타낼 수 있다고 본다. 아주 직설적으로, 보면 안 되는 것들, 이를테면 노골적인 인종차별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아직 가치가 확립되지 않은 아이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보지 마!"라고 명령하는 것.


그렇다면 안대를 쓰고 싶은 정신질환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영화는 이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when they go low, we go high라는 구호에서 정신질환자는 high하게 스스로를 보여야만 받아들여질 수 있고, 트럼프 같은 정신질환자는 그냥 죽여도 된다는 함의를 나타낼 때에, 정신질환자는 자신이 영화의 말미에 아름답게 보였던 대안가족 공동체에 속해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 자신의 low한 부분이 드러날지 전전긍긍하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순간 저 사람들이 안대를 쓰고 나를 대할 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과연 인권적인가? 진보 진영이 내세워야 할 전략이고 가치인가? 만약 그렇다면 미국의 진보 인권 운동은 어딘가 한참 잘못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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