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습니다.
'우먼 메이크 필름: 영화사가 잊은 영화들'의 1편, 오프닝과 분위기를 다루는 에피소드에서는 단연 이 영화를 중요한 영화로 꼽고 있다. 설명을 옮겨보자면 이렇다. "메시키니의 의붓딸인 사미라 마흐말바프는 영화 '칠판'에서 상징적인 오프닝 장면을 담았습니다. 이곳은 쿠르디스탄입니다. 칠판을 등에 진 교사들을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했습니다. 칠판은 이들 직업의 도구기도 하지만 첫 장면부터 칠판에 대해 굉장한 인상을 남깁니다. 때로는 검은 새 무리처럼 보이죠. 사담 후세인의 화학 무기 공격이 이어지자 칠판은 이들의 방공호가 됩니다. 이후 칠판은 이 실감나고 인상적인 영화 속에서 아픈 사람을 싣는 들것이 되었다가 부러진 다리의 부목이 되기도 하고 남녀를 서로 볼 수 없게 하는 가리개 역할도 합니다. 임시로 지은 집의 문이 되기도 하고요. 이 강력한 오프닝 장면에 여러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체리향기(1997)',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 그리고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로 대표되는 이란 영화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그것은 서양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잃어버린 순수성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서양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정말 이란의 현실이었을까? 여러분은 이란의 역사를 아는가? 1979년에 일어난 이란 혁명과 그로 인해 불탄 무수히 많은 극장들, 그리고 그 대신 세워진 혁명 본부와 그 혁명의 불길이 이라크에까지 번져올까 두려웠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함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을 아는가? 그리고 쿠르드의 역사는? 제 땅을 가지지 못하고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사이에 걸친 고원지대, 쿠르디스탄을 떠돌며 사는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는가? 아마도 모를 것이다. 안다면 박수를 쳐주고 싶다. 당신의 마음이 세계의 그늘진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모든 이야기를 하는 것에는 지면의 한계가 있다. 워낙에 얽히고 섥힌 복잡한 이야기고 나는 이것 비슷한 이야기를 이미 영화 '파르바나 - 아프가니스탄의 눈물'을 설명하면서 했다. 이란 혁명 이전 이란을 통치하고 있던 팔레비 왕조는 서구에 의해서 독재자가 되었다. 이란 사람들은 독재자를 몰아내려고 했고 서구에 반하는 이슬람 정신으로 이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시아파가 선두에 섰다. 이란 혁명은 성공했지만 독재자 대신에 이슬람 종교 지도자를 수장으로 앉혔고 이란은 신권정치를 하는 신정국가가 되었다. 당시 좌파 사람들과 예술가들 또한 독재자를 몰아내는 혁명을 지지했으나 좌파의 가치가 서구에서 온 가치가 아니느냐는 판단 하에 이 사람들은 투옥되었고 이란은 탄탄한 이슬람 시아파 국가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역시 서구에 의해서 독재자가 된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했고 전쟁이 일어났으며, 사담 후세인은 서구의 지지를 받으며 이란과 전쟁을 벌였다. 9.11 테러 전 까지는 말이다. 결국 요점을 이야기하자면 이란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는 종교 지도회의의 검열을 받는다. 이 영화가 전세계에, 그리고 이란 국내에서 상영되어도 괜찮은 영화인지 아닌지 말이다. 그리고 그 시각은 매우 보수 이슬람적이며 이란의 현 정권을 옹호하는 쪽의 내용일 것임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그러니, 서구에서 인기 있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그는 본인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서구에 보여지고 싶은 모습의 이란을 그려내는 감독이라고도 평할 수 있겠다. 반면 마흐말바프 감독은 어떨까. 일단 아버지인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혁명 이전까지는 정치활동을 하다가 혁명 이후 문화활동쪽으로 진로를 바꾸어 영화감독이 된 케이스로 작품성과 함께 흥행성도 갖춘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란의 비평가와 대중에게 두루 사랑받는 감독이다. 하지만 그가 보이는 세계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세계와 다르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세계가 순수하고 시적이라면 마흐말바프 감독의 세계는 현실적이고 냉정하다. 그가 의붓딸로 들인 사미라 마흐말바프는 18살에 '사과(1998)'로 데뷔했고, 역시 사미라 마흐말바프 감독의 세계 또한 현실적이고 냉정하다. 둘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 순수함은 그만 쫓고 현실을 보자."
이 영화는 이란의 현실, 그 중에서도 쿠르디스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쿠르드 족은 원래 오스만 제국의 일부분을 차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서방국가들이 쿠르디스탄을 멋대로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네 갈래로 쪼개버렸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이 땅들을 오가면서 살게 되었는데, 당연히 독립을 하자는 운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이 국가들에 의해서 인종학살을 당하기도 한다. 터키의 쿠르드 인종 청소는 터키가 EU에 들어오지 못하는 좋은 핑곗거리가 아니던가? 쿠르드는 독립을 도와준다고 해서 서방과 손을 잡고 일선에서 IS와 전쟁을 벌였지만 서방은 IS를 소탕하고 나서 쿠르드족을 처절하게 버렸다. 그리고 이곳에, 선생님들이 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다고 우리는 배웠다. 하지만 쿠르디스탄에서 스승이라는 건 별 볼일 없는 존재인 것 같다. 등에 짐짝처럼 칠판 하나 메고서 어딜 가야 학생들을 만날 수 있을까 끙끙대며 떼를 지어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보부상 같다. 그들은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워서 선생이 되는 것보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양치기나 될 걸 그랬다고 말하면서 지뢰가 잔뜩 깔린 길을 걸어간다. 머리 위로는 사담 후세인의 비행기도 지나다닌다. 이곳에서 선생이 된다는 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지식'을 파는 일이다. 마을을 겨우 찾아서 돌아다니면서 글을 읽고 쓰는 법을 알려주고 구구단을 가르쳐주겠다고 외쳐도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겨우 마주친 사람들은 도를 믿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처럼 서둘러 피해간다. 이건 세상의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길을 가다가 마주친 아이들은 등에 짐을 한가득 지고 밀수를 하고 있고, 노인들은 봇짐을 한가득 지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 헤매고 있다. 이봐, 네 이름을 쓰고 싶지 않니? 글자를 배우면 많은 것을 할 수 있단다. 그리고 산수를 배우면 좋은 곳에 고용이 될 수 있지. 그렇게 말하는 애처로운 선생님에게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가르치려면 선생님은 앉아야하고 우린 하루종일 계속 걸어가야 하는데 뭘 어떻게 배워요. 아이들도 애처롭고 선생님도 애처롭다. 그러다가 그 가파른 길에서 아이 하나가 떨어지고 칠판은 쪼개어져 부목으로 변한다. 그렇다, 글자를 배우는 것보다는 살아남는 것이 먼저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는다. 반토막 난 칠판으로 자신의 이름을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이름을 쓰는 법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그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외치면서 드디어 쓸 수 있다고 기뻐할 때, 그 아이는 국경 수비대의 총에 맞아서 죽는다. 그렇다, 글자를 배우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 먼저인 잔혹한 세상이다.
원래 머물던 곳이 후세인의 화학무기 공격에 의해 초토화가 되어서 새로운 곳을 찾아 헤메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 유목민들을 따라가는 선생은 칠판을 지고 온 군데에 물어본다. 여기 글자 배우고 싶은 사람 없어요? 할아버지, 여기 아이가 없나요? 하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글자를 배우는 것보다는 살아남는 것이 먼저다. 칠판은 아픈 노인을 싣고 가는 들것으로 변하고, 어느새 그 노인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그 노인의 딸과 결혼하는 데 쓰이는 결혼 지참금으로 쓰인다. 하지만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는다. 노인의 딸에게 글자를 가르쳐주기 위해 애를 쓰고 또 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칠판에 쓰고서, 따라 읽으라고 종용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여자. 그 여자에게는 오직 자신의 아들만이 중요할 뿐이다. 결국 도달한 이들의 고향, 그곳은 폭격으로 초토화가 되어 있었고 처참하게 변해 있었지만 어쨌거나 여자는 국경을 넘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선생은 이란 땅에 남기를 원한다. 칠판은 여자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여자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쓰인 칠판을 등에 지고서 아들과 함께 걸어간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것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암울하다. 그리고 매우 현실적이다. 이 스무 살의 어린 감독은 이 암울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나가는 힘이 있다. 칠판이라는 단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이 모든 현실들을 보여주었다는 데에서 이 감독의 천재성이 드러나고, 그리고 쿠르디스탄과 중동의 아픈 현실이 드러난다. 이 감독은 헛된 희망이나 꿈 같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죽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읽을 수 없는 여인이 그 글자를 지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어쩌면 좋으냐고. 도대체 어쩌면 이 지뢰밭과 화학무기와 총탄이 가득한 세상에서 아이들이 웃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글로 쓸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