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습니다.
얼마 전에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2003)'을 보았다. 그래서 이 두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왜냐고? 그 영화는 68혁명의 골방 운동가와 골방 철학가, 그리고 골방 예술가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사진을 온 방의 벽에 붙여놓고서 홍위병을 찬양하는 골방 운동가는 50년대, 그리고 60년대 미국이 벌이고 있던 베트남전쟁과 미국 본토에서 일어나고 있던 흑인 민권 운동에 대해서는 얼마나 정확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광들인 세 사람은 홍위병들이 중국의 문화인들을 얼마나 탄압하고 당시 중국의 영화는 얼마나 기괴할 정도로 마오쩌둥을 찬양하고 있는지 알 리가 없었겠지만, 어쨌거나, 한 번 그들의 시각에서 보자고. 영화를 통해서, 60년대를 들여다보자는 말이다.
미국의 60년대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셀마 몽고메리 행진'이다. 그걸 소재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셀마(2014)'. 마침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어서 시기도 좋았고 OST도 굉장히 좋아서 아카데미 수상을 했다. 한 번쯤 들어보기를 권장한다. 영화 만듦새 자체는 그닥 훌륭하지는 않지만 의미 차원에서 볼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셀마 몽고메리 행진. 그건 흑인들의 투표권과 민권을 위해서 움직이던 마틴 루터 킹의 주도로 인해 셀마부터 몽고메리까지 행진을 하는 사건이었다. 자세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많은 피가 흘렀고 결국 행진은 이루어졌다. 이 행진을 촉발시킨 사건은 경찰관의 흑인인 지미 리 잭슨에 대한 발포였는데, 지미 리 잭슨은 민권 시위 도중 어머니를 보호하려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가? 이 이야기는 2009년의 오스카 그랜트가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을 다룬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2013)'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그리고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과 Black Lives Matter 운동의 격화로도 이어진다. 왜 흑인은 경찰의 총에 그토록 많이 맞는가? 50년이 지나도, 70년이 지나도, 170년이 지나도 왜 변하는 것은 없는가? 심리학 실험에 따르면 심지어 흑인 본인 조차도 화면에 백인보다 흑인이 나타났을 때 총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지각하는 확률이 훨씬 높다. 슬픈 일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사람들은 흑인이 백인보다 폭력적이고 거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흑과 백(1958)>은 그런 편견을 깬다. 이 영화는 굉장히 시대를 잘 담아낸 영화로, 흑인 죄수와 백인 죄수가 서로 수갑에 묶여서 함께 탈주극을 벌이는 버디무비다. 나는 처음 이 영화를 보고 꽤나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인종간의 조화를 영화에서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꽤나 1958년 치고 선구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이 영화의 흑인 주연을 맡은 시드니 포이티어는 당시 많은 흑인 역할을 맡은 선구적인 배우였다. TV화면에 백인들밖에 나오지 않고 블랙페이스가 등장하던 시절, 시드니 포이티어는 흑인들의 얼굴이었다. 어디든 흑인이 필요한 곳이라면 달려갔고 흑인을 묻혀야 하는 곳이면 흑인을 묻혔다. 그리고 항상 젠틀한 역할이었다. 흑인은 폭력적이고 거칠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서다. 시드니 포이티어가 화면 속에서 폭력을 행사한 적은 딱 한 번인데, 그 다음 장면에서 바로 얻어맞았기 때문에 사실상 그건 폭력을 행사했다고도 할 수 없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 사람은 훌륭한 민권운동가였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실제로 당대의 흑인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나는 경찰이 우리에게 총을 먼저 쐈다면 우리도 쏴도 된다고 생각해." 이것이 최근에 Black Lives Matter 티셔츠를 입고 있던 미국인 친구에게서 들은 말이다. 나는 이 얘기를 듣고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한국에는 총이 없으니까. 무수히 많은 시위에 나갔던 나도 경찰을 그리 고운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다시말해서, 미국에는 총이 있고 경찰이 총을 들고 우리를, '나'를 죽인다. 그러니 나는 폭력적이고 거칠어질 수밖에. 그런데 '나'를 대표한다는 사람이 TV와 극장 스크린에 나가서 우린 사실 폭력적이지 않고 거칠지 않아요, 우리 악수해요, 라고 내 의견이라며 대신해서 말하고 다닌다면? 나는 울화통이 터질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Black Lives Matter를 외치고 있는데 이 흑인 대표 얼굴이라는 자는 All Lives Matter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도 백인들이 듣기 아주 좋은 방식으로, 우아하게.
그래서 이 영화, <흑과 백(1958)>의 마지막 장면에서 경찰이 잡으러 오는 걸 보면서 시드니 포이티어가 백인인 토니 커티스를 품안에 안고 노래나 부르고 있는 장면은 흑인들에게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장면이었겠는가. 내 생각과 달리 이건 인종화합을 노래한 작품이 아니라 자칭 진보적인 백인들이 보기에 좋도록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검열된 작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모든 인권 운동이 그렇듯이, 소수자가 기득권의 눈치를 보면서 인권을 외쳐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기득권까지 얼러가면서 노래를 불러야 할 이유가 뭔가. 지금 당장 총구가 내 눈앞에 있는데.
이쯤에서 여러분은 왜 내가 이 영화와 비교대조할 영화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을 들고 왔는지 궁금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흑과 백(1958)>에 비해서 인종적으로 엄청나게 혁명적이다. 영화가 독립영화사에서 가지는 의미 또한 혁명적이지만,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건 인종적으로 거의 폭탄 급의 영화였다. 그러니까, 총을 든 흑인남자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남자가 다른 모든 백인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 의견은 받아들여지고, 영화 러닝타임 내내 인종에 대한 언급은 단 하나도 없다. 미친 거 아냐? 이건 당대의 사람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장면이었던 것이다.
사실 원래 주인공은 흑인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게 아니었다고 한다. 각본에는 각 역할에 대한 적합한 인종이 적혀 있지 않다. 어쩌다보니 주인공 역으로 뽑힌 게 두안 존스였고, 두안 존스는 흑인이었다. 그게 다다. 영화 각본에는 두안 존스가 백인 여자에게 거칠게 명령하고 다루는 장면이 있었고, 두안 존스는 이 장면에 대해서 인종적 예민성을 내세우며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제작진들은 그냥 가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 역할은 그래야만 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장애인권동아리에 있었을 때 한 번은 어쩌다가 내가 장애인권동아리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다. 술자리였는데, 나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이전 동아리에서 남자 선배가 찝쩍거려서 거길 나왔는데, 마침 내 친구가 장애인권동아리 회장이라서 날 여기에 꽂아줬어. 휠체어 이용자였던 선배는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게 다여서 좋다고. 거창한 무언가가 없어서 좋다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쩌면 그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의 소수자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무언가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차별적인 게 아닐까? 어쩌면 유토피아는 모든 소수자성이 그냥 개성이 되어버리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주인공 역에 흑인이 오든 백인이 오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그런 세상이. 휠체어 이용자가 장애인권동아리에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장애인권동아리가 사라지고 장애인들은 장애를 개성으로 가지고서 아무 원하는 동아리에나 들어가는 그런 세상이. 그런 세상이 유토피아가 아닐까?
결국 이 영화의 주인공, 두안 존스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있다가 그를 좀비로 오인한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다. 그 장면은 유일하게 인종적으로 의미심장하다. 지미 리 잭슨, 오스카 그랜트, 그리고 조지 플로이드의 짧았던 생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을 한 번도 인종적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어떤 유색인 학교에서 이 영화를 교재로 사용하고 나서 아이들에게 감상을 물었을 때 "경찰이 그가 좀비인지 아닌지 좀 더 유심히 봐야 했어요. 그는 흑인이기 때문에 죽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 전까지는. 그것이 나의 무지함일 것이다. 무언가를 깨닫게 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지고 좀 더 다양한 방향에서 매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내가 세상을 좁은 구멍으로 보는 게 아니기를 희망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작품이, 어떤 사람에게는 끔찍한 악몽이 될 수도 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은 나에게 그런 정말 귀한 교훈을 가르쳐준 소중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