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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산드라 Dec 30. 2021

파르바나 -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 스포일러 있습니다.

파르바나 - 아프가니스탄의 눈물(2017)

이 영화의 원제는 Breadwinner,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家長)이라는 뜻이다. 그 제목처럼 이 영화는 탈레반 치하에서 소녀 파르바나가 어떻게 집안의 가장이 되어 생계를 유지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데보라 앨리스의 '브레드위너'라는 책 시리즈를 원작으로 캐나다,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데보라 앨리스는 생생한 취재를 위해 파키스탄 국경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서 지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영화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한국어 제목이 '파르바나 - 아프가니스탄의 눈물'이길래 대충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를 다루나보다 했고, 무엇보다 작화가 예뻐서 눈길이 갔다. 그래서 보기 시작한 이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이었고, 논란적이고, 작품성있었다. 


파르바나 - 아프가니스탄의 눈물(2017)

영화는 극 중 극의 형태로 진행된다. 액자 바깥에서는 탈레반 치하 탈레반에게 밉보인 아버지가 불심검문으로 들이닥친 사람들에게 불온 서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 영장도 없이 끌려가고, 그러자 집에 남은 남자라고는 어린 아기인 막내동생밖에 남지 않게 된 파르바나는 머리를 자르고 남장을 하고서 시장에 가서 돈과 먹을 것을 구해온다. 남장을 한 이유는 탈레반 치하에서 여성은 남성의 동반 없이 홀로 집 밖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파르바나는 오테시('불'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바깥 세상에서 살아가기 시작하며, 끌려간 아버지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파르바나 - 아프가니스탄의 눈물(2017)

액자 속에서는 '코끼리 이야기'가 진행된다. 거대한 코끼리 괴물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모험을 떠나는 소년의 이야기인데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왜 영화의 중간중간에 삽입되는지 의아스럽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 가면 액자 밖의 이야기와 액자 속의 이야기가 같은 지점에서 만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거대한 코끼리 괴물과 싸우기 위해 길을 떠난 소년은 생계를 책임지고 감옥에 수감된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파르바나이기도 하고, 동시에 길거리에서 장난감을 주웠다가 장난감에 들어있던 폭탄이 터져서 죽은 파르바나의 오빠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복잡하다. 일단 영국이 잘못을 했다. (세계사에서 뭔가 꼬이고 분쟁이 일어난 곳을 보면 항상 영국의 발자취가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가니스탄이 러시아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몰아낼까봐 우려했던 영국은 뜬금없이 자기네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적법한 지도자를 세우는 것을 원조하겠다며 전쟁을 시작했고, 제멋대로 아프가니스탄에 자기들 입맛에 맞는 왕을 세웠다. 당연히 이 왕은 통치력이 약했고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몇 번의 전쟁 후에 영국은 자기들이 세운 왕조를 내버려두고 가버렸고, 아프가니스탄은 식민통치와 독립전쟁의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그 다음은 꽤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되었으나 그것도 잠시, 친소련 공산정부와 무자헤딘 간의 내전이 벌어진다. 무자헤딘은 이슬람 반란군을 칭하는 이름으로 현재 무자헤딘의 명맥을 이어받은 단체들이 거진 모두 테러리즘 단체들이 되기는 했지만 그 사람들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슬람은 아프가니스탄을 멋대로 식민통치하고 좌지우지하던 서구권에 반대하는 정체성을 지닌 일종의 독립운동인 셈이다. 이후 소련과 무자헤딘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그 다음은 기존 공산 정권을 몰아내려는 무자헤딘의 내전, 이 내전을 거치면서 발생한 무자헤딘의 군벌화, 그리고 이때 내전을 종식시키고 나라를 안정시키겠다며 등장한 것이 바로 탈레반이다. 상기할 점은 이 때 소련을 공격한다고 신나서 무자헤딘, 즉 이슬람 극보수주의 군벌들에게 무기를 열심히 갖다 넘긴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는 것이다. 그 무기로 무럭무럭 자란 오사마 빈 라덴이 비행기 두 대를 세계무역센터에 갖다 박았으니... 역사는 돌고 또 돌고, 중동의 문제는 대부분 제국주의 서구권의 탓인 게 맞다.


그러므로 중동의 문제는 정말 복잡하게 꼬여있다. 탈레반 치하, 그리고 지금은 알카에다, IS와 내전을 벌이는 곳의 문제를 보면 "민주화를 해야 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해결책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중동에서 민주화 인사들이란 보통 친-서구권인 경우가 많고, 서구권에 의해 식민지배를 당하고 전쟁을 많이 겪은 중동 입장에서 친-서구권이란 애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슬람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동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인데, 문제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엄청난 차별주의자이며 (미국이 신나게 무기를 준 바람에) 무장도 하고 있다는 것.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영어로 대사를 읊는 서구권 영화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탈레반에 의해서 아프가니스탄이 어떻게 변해버렸는지 보여주는 것은 좋지만, 그건 메타적으로 "중동은 이렇게 억압되었지만 우리 서구는 그렇지 않지, 아주 진보적이고 민주적이야."라고 생각하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또 아프가니스탄에서 이 정도 퀄리티의 영화를 뽑아내기에는 인프라가 부족하기에 (내 편견일까?) 서방세계에서나마 이런 애니메이션이 나온 것은 다행이긴 한데... 결국 아프가니스탄이 왜 이렇게 되었나 생각해보면 그건 서방세계 때문이고, 이 점은 영화에서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바시르와 왈츠를'을 읽을 때의 느낌이 들었다. 복잡한 중동 상황에 대해서 너무 한 면 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화에서 그 복합적인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다면 천재 감독이겠지만.


파르바나 - 아프가니스탄의 눈물(2017)

다시 영화 내적인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탈레반 치하에서 생계유지를 위해 남장을 하고서 살아가는 소녀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지점을 생각하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훌륭하다고 본다.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대사가 하나 나오는데, 파르바나의 친구인 델로와르(역시 남장을 한 소녀)가 오테시가 된 파르바나에게 "너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탈레반이라는 아주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권력 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그래서 오히려 정체성의 경계를 넘나들게 되는 것은 아주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그 상황이 FTM 트랜스젠더 아프가니스탄 청소년에게는 숨통이 트이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세상이 이상하면 거리에는 아이러니가 넘쳐 흐른다. 이 영화는 그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탈레반이지만 아내를 누구보다 존중하고 사랑하는 남자. 머리를 자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머리를 자르고 남자 옷을 입었더니 여성의 역할에 얽매이지 않게 된 파르바나. 처음에는 애국독립단체로 등장해서 나라를 처참히 파괴시킨 무자헤딘과 탈레반.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저마다의 Breadwinner가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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