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회를 시작했던 교회를 떠나 새 목회지 서울 삼양동 ㅇㅇㅇㅇ으로 이사하던 날, ㅇㅇㅇ교우님이 교회봉고차를 직접 운전해 우리 식구들을 서울에 데려다주셨다. 도착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차가 떠나려 할 때 겨우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졌다. 되돌아가는 교회봉고차의 마지막 뒷모습을 바라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에게 서울은 마냥 낯선 곳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엄마가 시골교회에서 목회하셨을 때 서울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아버지가 서울로 오셔서 목회할 때도 동대문 근처 용두동에서 살았기 때문에 제기동 전철역과 옆에 있던 미도파백화점 앞은 친구들과 자주 만나던 약속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ㅇㅇㅇㅇ에 가서 처음 살았던 곳은 낯설었다. 서울시내 어디를 다녀오더라도 전철 4호선 미아사거리역에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했다. 두 돌 이 안된 작은 딸은 내 등에 업혀있다가도 버스가 본격적(?)으로 언덕길을 오를 때가 되면 제 얼굴을 내 등에 바짝 파묻곤 했다. 제 딴에도 심상치 않은 무슨 느낌이 들었던지.
포장이사라는 게 없던 때라 일일이 쌌던 짐들을 다시 일일이 풀어야 했다. 엄마는 짐정리를 하면서도 나한테 계속, 했던 말을 하고 또 했다.”애들 절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해라.”
우리가 살 곳은 방 두 개 , 연립주택 1층이었다.
현관문만 나가면 유리로 된 공동문이 있었는데 늘 열려있었다. 큰딸이 세게 힘주어 밀고, 서너 발자국 걸어 나가면 마을버스가 온종일 오르내리던 찻길이었다.
이사 첫날밤, 마을버스 다니는 길가, 안방 창문으로 보았던 산동네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해가지며 어둑어둑해지더니 금세 속초 밤바다 색깔 같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산꼭대기 집부터 켜진 불빛이 차츰차츰 밑으로 밀려 내려오는 듯했다.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이 켜질 때처럼!
큰방에서는 엄마와 딸들과 내가, 작은방에서 남편혼자 잠을 잤다. 나는 미아7동의 첫날밤에 무슨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막막한 마음뿐이었다.
언젠가 남편은 “미아7동 집에서 첫날, 자려고 누웠는데 ㅇㅇ어머니와 ㅇㅇ어머니가 갑자기 생각나면서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라고 말했다.
두 분 어머니는 우리가 평택의 시골교회로 발령받고 갔던 다음날 아침에, 수돗가에서 상추를 씻고 계셨던 어머님들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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