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찰스 다윈이 남긴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은 많은 이들에게 왜곡되어 받아들여졌다. 그의 이론은 모든 생명체가 다양한 형태의 변이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그 환경에 가장 최적화된 형태의 생명체가 살아남는다는 의미였지만, 이것은 살아남은 생명체가 최적자이며 승자 독식의 정글 같은 세계에서 약육강식의 생존 방식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했다. 물론 이러한 오해에 다윈의 잘못은 없다. 모든 건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뇌가 잘못일 뿐. 물론 이 책의 서문에 적힌 최재천 교수의 글처럼 다윈이 만약 적자라는 용어에 fittest라는 최상급이 아닌 fitter라는 비교급을 사용했더라면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바로 그 적자생존, 가장 적합한 자가 살아남았다는 말에서 따왔다. 인류사를 연구한 저자는 현생 인류와 DNA를 공유하는 유인원들을 연구한 결과 현생 인류에 해당하는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은 데에 친절함이 큰 역할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가 되었고, 원제는 《Survival of the Friendliest: Understanding Our Own Species and How We Evolved to Thrive》다. 적자생존의 영어 표현인 'Suvival of the Fittest'에서 적자에 해당하는 'the fittest' 대신 'the Friendliest'를 넣은 것이다. 어쩐지 계몽적인 사회학 서적처럼 들리는 한국어 제목과 달리 영문 원제가 드러내는 바는 명확하다. 적자생존이란 단어가 불러일으킨 '경쟁, 생존' 같은 대중 오해를 정면으로 부딪히며 그보다 상냥함, 친절함, 다정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오해가 있었다. 우선 책의 장르가 사회과학일 거라고 착각했다. 어느 독서 모임에서 '인간의 공감 능력이 지금처럼 확장된 것은 과거에는 보살필 수 없었던 사람들까지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 사회가 발달하고 풍요로워졌기 때문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 있는데, 그때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이 책을 언급하면서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 책이 서로에게 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과학 서적이며, 제목이 곧 책의 전부인 별 볼 일 없는 내용이라고 오해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사실과 달랐다. 이 책을 펼쳐 직접 확인하기까지 몇 년이 걸리긴 했지만, 이 책은 인류사를 다룬 과학 서적이며 사회 현상이나 규범을 다루지 않고 철저하게 연구 내용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저자는 다른 유인원들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를 찾는다. 여기에는 많은 내용이 등장한다. 뇌의 크기나, 골격의 발달, 언어의 발달유무, 심지어 호르몬까지 등장한다. 이 많은 분야를 파고든 연구로 알 수 있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더 체격상 우월했거나, 똑같이 집단생활을 이루고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심지어 비슷한 수준의 문명을 이룩한 이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호모 사피엔스가 결국 그들을 제치고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종으로 남게 된 것은 집단을 이루는 힘 때문이었다. 수렵 채집 수준의 규모에 머문 다른 유인원들과 다르게 호모 사피엔스는 거대 집단을 이룰 수 있었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집단을 이루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기 가축화 가설'로 설명한다.
자기 가축화는 쉽게 말해 인간이 스스로 길들였다는 뜻이다. 우리가 가축화하여 함께 생활하는 동물들의 경우 인간과 정서적인 교류가 가능하고 서로 의미하는 바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경우 그 손가락을 빤히 쳐다보는 동물이 있는가 하면 개처럼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는 동물이 있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 표현을 읽어내고 공감하는 동물도 있다. 원래 야생의 것이었을 이 동물들은 인간과 교류하고 길들여지는 과정을 거쳐 온순한 가축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인간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상냥하고 온순한 행동과 표현을 드러내면서 서로 집단화를 이루기가 더욱 쉬웠고, 그 덕에 다른 동물들과 달리 거대한 집단을 이룰 수 있었다. 책은 이 과정을 하나씩 나눠가며 다루는데, 대중 서적으로 접근하기에는 지나치게 자세한 내용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중반에 포기하기 쉬운데, 그건 사회과학이 아니라 인류사 연구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학술적으로 지나치게 상세한 내용을 다룬 부분이 조금 지루했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난 후부터는 집중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중후반 이후 갑자기 기조가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건 철저히 학문적인 입장에서 기술하던 책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밝혔듯 저자들이 트럼프의 당선과 전 세계가 분열과 대립으로 상징되는 정치 흐름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시기에 출판된 책들의 공통점이기도 한데, 많은 학자들이 이런 세계적인 흐름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나머지 자신들의 목소리를 좀 더 강하게 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뇌 과학, 인지 심리학, 인류학, 역사 등 각종 분야에서 인간은 원래 대립과 경쟁이 아닌 협동으로 생존해 온 동물이라며 공감과 연대를 주장하는 책들이 등장했다. 이 책도 같은 기조하에 쓰였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교조적이라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혹은 학문적 이야기에서 갑자기 정치 선동적인 태도로 바뀌었다고 어색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어 원제와 달리 한국어 제목이 드러내는 것처럼 이 책은 애초에 그 방향성을 밝히고 있다. 다정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그렇게 생존해 왔고, 그것이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라는 것. 다만 그것을 인류사 연구를 통해 아주 세세하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의 의견에 동조할지 안 할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적어도 책에 적힌 인류학 지식이 무척 흥미로웠다는 점만큼은 밝히고 싶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책을 따라가다 보면 연구 결과가 의미하는 바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정말 다정하였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일까? 아니면 이것은 저자가 그렇게 보고 싶은 것일까? 이 질문과 함께 인류사의 역사를 훑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 도전해 보길 바란다. 600페이지가 넘는 대장정 중에 막히는 부분에서는 과감히 건너뛰어도 좋다. 확실한 건 이 책에서 얻은 지식들을 다른 책에서도 분명 만나게 될 거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