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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사 Jan 26. 2024

분리수면을 준비하다

엄마의 분리불안

첫째가 정말 많이 컸다. 이제 “아가”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를 벗어난 38개월이고, 그전부터 생각만 해왔던 분리수면을 진짜로 해보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사실 부모의 가치관에 따라서는 아주 어린 갓난아기 시절부터 분리수면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아무래도 아이와 따로 자야 부모도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되고, 그게 다음날의 컨디션을 좋은 상태로 만드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찍부터 분리수면을 한 아이들은 이후에도 어렵지 않게 그 습관을 유치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도 엄마 옆에서 자려고 하는 병폐가 발생한다. (실제로 주위에 있었음) 그래서 어느 시기에 이르면 엄마의 굳은 결심이 필요한 것이다. (보면 아빠는 늘 분리수면에 찬성하는 입장인 듯하다.)


그런데 매일 누군가와 함께 살을 맞대고 잠을 같이 잔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비단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과 함께 잠을 자게 되면 그 존재는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가족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내가 거의 무의식 상태에 놓이게 되더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함께 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정말 최고의 신경안정제 아닐까?

 

그래서 분리수면에 나는 어떤 심리적 저항감이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의 뒤척임, 새근새근한 숨소리, 보드라운 살결이 아쉬운 것이다. 분리수면을 막는 것은 아이들의 분리불안이 아니라 엄마의 그것이다. 마치 어렸을 때 꼭 껴안고 자는 애착인형을 빼앗기는 느낌이랄까. 어느새 복닥거리는 침실이 내겐 더 익숙한 정경이 되어버린 것.


그러다가 종종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어린이가 되어버린 첫째의 의젓함을 맞닥뜨린다. “언제 이렇게 컸어?” 요즘 내가 아이들을 껴안을 때 습관처럼 하는 말이다. 이제 두 녀석 모두 내 품 안에 다 들어오기에는 좀 벅차다. 종국에는 엄마 품을 어색해하는 시꺼먼 녀석들이 되어 버리겠지만…


과거를 회상해 보면, 나 역시 어느 시기까지는 엄마 아빠 방에서 다 함께 그 공기를 향유하며 잠을 잤다. 그러다 어느 시기에 ‘우리방’이라는 것이 생겼고, 그러면서 엄마보단 자매들이나 친구들이 더 재밌고, 좋아지는 단계로 넘어갔다. 그런데 가끔 엄마가 우리 침대에 들어와서 자고 있는 우리들을 마치 아기를 대하듯 꼭 안아 주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게 좀 낯설어서 일부러 자는 척하며 무시했는데, 이젠 엄마의 그 심경을 이해할 것 같다.


하여간 이번 겨울까지만 공동수면의 행복을 누리려 한다. 그동안 엄마의 예쁜 인형이 되어주어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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