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논쟁, 왜 지금인가

by 두루미

“역사가 정치 논쟁에 휩쓸리는 것은 그 국가가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신호다.” 영국 브렉시트 투표가 얼마 남지 않은 2016년 5월 13 일 정치 칼럼니스트 기디온 라흐만(Gideon Rachman)이 파이낸셜 타임즈 (Financial Times)에 기고한 글의 한 구절이다. 1993년 EU 출범 이후, 독일과 프랑스와 함께 EU의 빅 3인 영국이 EU 탈퇴를 국민 투표로 결정한다는 뉴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상징적 존재인 EU의 미래와 결부되어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2008년 미국발 경제 위기 후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극우 세력이 EU에 대한 늘어나는 회의감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영국의 결정은 제도적 지각 변동까지 가지고 올 수 있었다. 찬반 논쟁에 역사가 소환되는 것을 보고 라흐만은 브렉시트 투표가 EU와의 경제적 관계 재설정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대신, 영국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근대 국민 국가 질서의 산물인 영국에 두어야 할지 아니면 국민국가 질서를 넘어서려 하는 EU에 두어야 할지, 그 본질적 선택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학부 때 자신이 역사를 공부했던 캠브리지 대학을 방문, 그는 역사적으로 “영국만의 고유성”이 존재한다고 보는 쪽과 “영국만의 고유성은 허구다”라고 주장하는 브렉시트와 연관된 역사학계의 논쟁을 소개했다. 전자 입장의 학자들은 EU가 주권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 즉 EU가 각 주권 국가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선회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고, 후자인 친-EU 역사학자는 2차대전의 쓰라린 경험을 상기하며 한 사회의 독자성에 대한 강조가 자칫하면 국수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경제 질서 너머의 변화를 포착한 라흐만의 통찰력은 이후 더 현실화되었다. 당시 “American First”를 앞세워 국제적인 협력보다는 자국 우선적 이익과 정체성을 내세운 도날드 트럼프가 2017년 1월 백악관으로 입성했다. 지켜보는 사람들조차 지치게 만들었던 2년 반에 걸친 노동당, 보수당 내 온건파, 강경파와의 정치 싸움에서 최종 승리자는, 유럽과 함께 가지만 그 일부로 편입되지는 않겠다는 윈스턴 처칠의 원칙을 계승, 자국 독자성을 지향하는 보리스 존슨이었다.


영국의 이야기가 먼 이야기 같지만, 한국도 비슷한 시기에 역사 논쟁이 벌어졌다. 시작은 ‘올바른’ 국가 의식을 교육해야 한다는 2016년 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었다. 2017년 3월의 탄핵과 5월 조기 대선 등 급격한 정치적 변동을 겪으며 국정화 계획은 취소되었지만, 과거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은 계속 튀어나왔다. 친일파를 대거 재기용한 이승만, 만주에서 일본군에 복무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반공을 내세우며 경제 근대화를 추진한 박정희, 독립운동을 했으나 월북한 김원봉, 식민지기 일본군이었으나 한국 전쟁 때 공을 세운 백선엽 등이 논쟁의 중심에 섰다. 개별 인물에 대한 논쟁을 넘어가면 1948년 건국과 정부 수립 간의 용어 논쟁, 반일 종족주의라는 개념, 식민지 근대화론, 위안부 문제, 광주 민주화 항쟁 등이 있었다. 이 역사 논쟁은, 물꼬가 트일 것 같다가 하노이 회담 결렬로 꼬여버린 북한과의 관계, 2차 대전 징용 배상 문제로 촉발되어 외교 문제로 번진 일본과의 갈등, 일본의 경제 보복과 그에 대한 불매 운동 등 현실 문제와 연동되면서 정치권으로 확산되었다. 누구에게는 친북(혹은 종북)의 딱지가 누구에게는 친일의 딱지가 붙여져 선거 운동에도 등장했다.


한국 역사 논쟁의 중심에 있는 반일과 반공은 현실에서 대립하는 위치에서 경쟁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양쪽 모두 공동의 목표를 부각시킴으로써 내부 갈등을 무마시키고 사회를 결속시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둘은 각각 다른 대칭되는 개념을 가지고 다른 이데올로기를 동원한다. 친일 논의는 제국주의의 대항 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 반사회주의인 반공은 남한의 정치 체제에 국한되는 애국주의 (state patriotism)에 기반하고 있다. 반일 민족주의와 반공 애국주의 2차 대전을 계기로 제국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기존 질서가 냉전 질서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선후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일정 정도 무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49년을 기점으로 이 둘은 얽히고 갈등 양상으로 발전했다. 1949년은 남북한 정부가 세워졌지만 분단 질서가 사회 내부까지 자리잡지 못한 때였다. 통일을 최우선으로 놓아 남북한 둘 모두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들, 미처 체제 선택을 하지 못하고 고심 중인 이들, 남한에 있지만 북한 체제를 지지하는 세력, 북한에 있지만 남한 질서를 선호하는 세력 등이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뒤섞여 있던 시기였다. 영토는 갈렸지만 분단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견고하지 못했다.


사회적 동의를 강화해햐 하는 시점에서 이승만의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선택은 민족주의(반일)와 애국주의 (반공)중 민족주의에 가까웠다. 다시 말하면, 식민지 질서 해체를 통해 정치적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는 사회주의 운동 경력이 있던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하여 지주제 해체를 위한 농지 개혁을 맡겼으며 친일파 처벌을 위한 반민특위를 구성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48년 10월 여순 사건 이후 그 기조를 반공 애국주의로 급선회, 국가 보안법을 제정하고 좌익을 ‘계몽’시키는 국민보도 연맹을 세운다. 동시에 제헌 헌법에 제시된 분권적 지방 질서에 회의적 시각을 보이며 중앙 집권적 질서로 방향을 튼다. 분권적 질서를 구상했던 제헌 국회의 결정을 뒤집기 위해 이승만은 전쟁기 총독부에서 관료 경험이 있고 수직적인 중앙 질서에 능한 친일 관료들을 내무부에 포진시켰다. 이들은 이승만에 협조하는 대신, 사회적 관심을 식민지 문제에서 반공으로 전환한 후 자신들에게 불리할 반민특위를 해산시키길 원했고 이승만은 이를 승인했다. 국제적으로 고조되는 동서 갈등 속에 반공이라는 대세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냉전과 무관하게 해결할 수 있던 친일파 문제를 반공과 섞어 버린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단히 아쉬운 지점이다.


한국 전쟁을 계기로 식민지 잔재 처리와 북한을 민족 범주에 포함시켜 통일을 지향했던 민족주의 인사들의 입지는 현격히 좁아졌다. 이후 박정희는 반공을 지탱하는 애국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전통적 가치에 기반한 근대화를 추진하는 힘으로서 민족주의를 재구성했다. 일본 제국주의와 그 역사가 남긴 식민지 잔재 문제는 박정희식 민족주의 속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반공 애국주의와 한국적 근대화를 위한 민족주의, 이 둘의 결합은 1980년대 말까지 남한의 국가 주도 근대화를 구성하는 핵심이었다.


1990년대 이후,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는 신자유주의의 구호인 세계화와 국제화에 현저히 밀리게 된다. 민족주의는 개방성과 반대되는 폐쇄성으로 이해되었다. 역사학 내부에서는 민족주의를 ‘상상된 공동체’로 해석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면서 독립운동보다는 국경 간 유동성이 비교적 수월한 문화 영역, 근대성, 그리고 국경과 국경 사이에 걸쳐 있는 존재 등 탈민족주의적 주제로 관심이 쏠렸다. 역사 영역뿐 아니라 한국 사회도 국제화에 휩쓸렸다. 신자유주의 질서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유 무역을 경계하는 신토불이, 국내 문화 사업 보호를 위한 스크린 쿼터제 폐지 반대 같은 움직임이 있었지만, 대세는 FTA였다. 권장되는 국제적 마인드에 따라 어학연수, 해외여행, 조기 유학 열풍, 퓨전 음식, 외국 문화 이해하기 등의 사회문화적 풍조가 일었다. 이념에 의해 국가 간 장벽을 세웠던 냉전 질서의 산물인 반공도 힘을 잃기는 마찬가지로, 냉전 질서를 대체한 것이 신자유주의였다. 시장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며 국가 간의 진입을 낮추고 자유 무역-자유 경쟁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는 갈등을 전제로 하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힘을 뺐다. 다만, 해방 후 친일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현실적으로 북한과 휴전 중에 등장하는 북핵 문제 등 특수 상황 때문에 반일과 반공은 언제든지 발현된 가능성은 있었다.


그리고 2010년대 후반 신자유주의에 비교적 가려져 있던 반일과 반공이 재등장했다. 최근에는 중국의 문화 역사 동북공정과 연관돼서 반중 정서도 확산되고 있다. 싼 노동력을 찾아 경쟁적으로 중국으로 진출하고 중국어 능력자를 우대하고 일본 문화 개방에 이어 일본으로의 여행이 대중적으로 성행했던 과거 1990년대 후반-2010년대와는 확연히 대조적인 사회 풍경이다.


한국이 인접해 있는 북한-일본-중국 모든 국가와 갈등 지수가 올라가고 있는 현상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선, 신자유주의와 매끄럽게 양립하기 어려운 민족주의와 애국주의가 이 역사 논쟁 속에 내재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일단은 정점을 찍었고 재검토할 시점임을 시사한다. 현재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당면한 큰 문제는 정체된 ‘사회적 유동성’이다. 신자유주의 지지자들은 시장의 합리성이 좀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경쟁을 자극함으로써 계층 간 이동이 활발해지고 경제가 성장, 그 부가 전체 사회를 풍요롭게 할 것이라 기대했었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성립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보이는 것은, 합리적 시장의 이면인 시장의 몰가치성, 다시 말하면 시장의 비사회성, 비윤리성, 잔혹성이다. 전체적으로 성장은 했지만 부의 양극화와 과다한 경쟁 열 속에서 공정함이 줄어들고 경쟁이 기득권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 기득권을 더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된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다고 믿었지만 반대로 나오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고, 수저를 통한 신계급 비유는 일상화되었다. 사회적-환경적 가치보다는 시장적 가치가 사회를 압도, 이상적 공간을 묻고 추구해야 할 도시 계획은 투자의 기회로서 바라 보고 있다. 불공정에 대한 비판과 항의의 목소리와 동시에 사회적 박탈감에서 비롯된 분노도 증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나 인종 차별이 늘어나는 상황이다.


이 같은 사회적 단면은 시장의 양면- 효율성과 비사회성-을 둘 다 생각할 시기임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국가 주도 경제 근대화와 반공이라는 틀 속에서 한국은 시장에 대한 논의가 빈약했다. 시장에 대한 개입 움직임은 사회주의나 포퓰리즘으로 쉽게 비약되고,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 모델에 대한 익숙함때문에 시장으로 향해야 할 비판의 시선이 정부를 향하는 경향도 강하다. 지금은 시장을 바라보는 양극의 시선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 빠지지 않고 이 둘의 중간 지대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사회 복지와 더불어 유럽이나 미국에서 대안으로 제시되는 “윤리적 자본주의 (ethical capitalism,)”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적 투자 (social investment)”등은 다 같이 공유해 볼 만하다.


현재 역사 논의에서 생각해 볼 또 하나의 문제는, 앞의 라흐만이 지적한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다. ‘누가 우리인가,’ ‘우리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동아시아와 한국은 역사적으로 비교적 단일 사회를 구성하고 신자유주의를 국민국가 형태를 유지한 채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럽의 영국처럼 ‘우리만의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해체주의적인 질문까지 나아가기는 어렵다. 현재 벌어지는 중국과의 역사 문화 갈등도 각자의 고유성, ‘우리를 구성하는 것’을 둘러싸고 싸우는 중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내부로 돌리면, 한국은 필연적으로 한국 사회에 남은 식민지 잔재, 북한, 21세기 들어 급격히 증가한 이민자를 마주하게 된다. 특히 북한이 ‘우리에 포함되는가’라는 질문은 환기시킬만한 문제다. 헌법 전문에 통일이란 단어가 삽입될 정도로 통일은 분단 이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핵심 가치요 목표였다. 하지만 한국 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 선언이었던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이후 지금까지 누그러질만한 기회가 몇 차례 있었지만 양국은 고비를 넘기지 못했고, 계속되는 남북 긴장 속에 북한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다. 통일을 지향하는 측에서도 해야 하는 이유, 어떤 수순으로 접근해야 하는가에서 차이가 있다. 반면, 분단 질서에서 태어나 분단에 익숙한 세대일수록 북한 사회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나 통일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부분은 북한의 태도, 미-중과의 관계와 연동되어있기 때문에 최고 난이도이긴 하다. 하지만, 혹시 아나... 1948년 남한의 단독 선거 직전, 분단을 막고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절절한 심정으로 38선을 넘어 북으로 향했던 김구와 김규식의 꿈이 이루어질지…


신자유주의의 미래는 아직 불확실하다. 2020년대가 누군가가 말하는 신냉전 질서 혹은 또 다른 질서로 교체되는 과정인지 아니면 조정되는 단계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역사 논쟁에서 나타나듯이 관심이 내부로 쏠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 갈등 해결을 향한 개혁의 원동력이 될지 아니면 내부 갈등을 덮어버리고 외부와의 갈등에 집중하는 모습이 될 지는 우리 사회의 몫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