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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Jan 24. 2024

업을 한 겹 덧대고는 예쁜 옷을 입은 줄 알았다

패션지옥 윤회에서 벗어나기

나는 옷을 참 좋아한다. 외모지상주의자인(였던?) 나는 외모로 남들의 환심을 사고 싶었고, 외모를 꾸미는데 옷이 중요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옷차림도 전략이라는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 백화점으로 달려가 옷을 샀다. 옷을 사는 동안 점원에게 존중받는 느낌이 좋았고, 내일 다시 전장으로 나갈 갑옷을 마련한 듯 든든했다. 


그렇게 큰 방 하나가 옷으로 가득 찼고, 통장 잔고는 비어갔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대부분의 옷을 정리했다. 집을 작게 줄여 옮기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몇 년 동안 입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입지 않을 것 같은 많은 옷들을 정리하면서, 지구환경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옷만 가지고자 했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 동안 옷을 거의 사지 않았다. 


인문학 공부를 하는 1년 동안 나의 화두는 언제나 ‘욕망’이었다. 항상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눈치 보게 만드는 그 배경에 ‘욕망’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옷에 집착하는 것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글쓰기를 하면서 어느 정도 인정욕구와 옷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한 계절을 3벌의 옷으로 교복처럼 출근복을 삼으면서, 궁색함 보다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믿었다. 

그러다 최근에 우연히 옷을 판매하는 SNS 라이브방송을 보게 되면서 예쁜 옷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예쁜 옷을 계속 지켜보긴 했다. 인터넷 브라우저 창 한쪽 구석에 옷 광고가 보이면 외면하지 못했다. 그래도, 클릭을 해서 구경만 하고 구입하진 않았다. 그러다 라이브방송 모델의 예쁜 모습을 보고, 나도 저 옷을 입으면 저리 예뻐 보일까 싶었던지 어느 결에 주문을 하고 송금을 했다. 다음 날 다시 방송을 보고, 또 주문을 했다. 2주 동안 거의 백만 원 가까운 돈을 옷을 사는데 썼다. 지난 7년 동안 쓴 옷값보다 많다. 심지어 그 돈은 새해 인문학 공부를 할 강의료로 모아둔 돈이다. 흐엉.. 미쳤다. 


헐렁해진 옷장이 뿌듯했던 건 허세였나? 지구환경을 걱정했던 것도? 옷에 대한 욕망이 없어졌다는 생각은 착각이었음이 증명되었다. 공부할 돈을 꺼내 옷을 사놓고는, 배송되는 옷을 기다리면서 즐거움에 흥분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마음이 아주 즐겁기만 한건 또 아니다. 즐거움 뒤엔 죄책감이 따라왔다. 옷을 보면 좋았다가, 통장 잔고를 생각하면 괴롭다. 마치 10년 불공을 날려먹은 기분이다. 괴로움을 느꼈으면 멈춰야 하는데, 주문하고 자책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어제 주문한 옷을 기다리면서 설레고, 동시에 자책으로 괴롭다.


이런! 1년 동안 헛공부했다. 인문학 공부를 통해 인정욕구를 내려놓으면서 옷에 대한 욕망도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상황 조건이 맞춰지니 제대로 회귀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그동안 느꼈던 자유로움이 모두 거짓인 걸까? 그동안의 오랜 습으로 잠깐씩 예전 마음이 올라오긴 했지만, 그 마음이 머무는 시간이 짧아진 건 분명하다. 나는 분명 달라졌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제 와서, 봇물이 터지듯 옷을 산 것일까? 


  텍스트의 당위를 좇으면 안 돼요. 진짜로 마음에 와닿아야 해요그렇게 될 때까지 계속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고민해야 해요그래야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거예요.” 「안혜숙_감이당 대중지성 일성 담임」


공부를 하면서 타인의 인정이 망상임을 배웠고, 그 망상을 좇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위만을 좇아 다짐만 했던 거다. 살얼음판 위에 덮인 먼지를 보고는 땅인 줄 알았다. 마음에 일어난 욕망을 망상이라 이름 짓고는 살포시 덮어 감춰둔 것이다. 그러다 땅인 줄 알았던 얼음판 위로 올라서는 순간 얼음이 깨지고, 그 속으로 깊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참 달콤하다. 슬프게.


이쯤 되니 옷은 나에게 업이고 윤회라는 생각이 든다. 불교에서는 쾌락을 좇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전생의 업이고, 쾌락과 괴로움을 반복하는 것이 윤회라고 했다. 이미 충분한 옷을 가졌음에도 자꾸만 새 옷을 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나의 업이고, 그걸 참지 못해 옷을 사고는 즐거웠다가 무리한 지출에 괴롭기를 반복하는 것이 나의 윤회인 것이다. 


육도윤회(六道輪廻)는 일체중생이 자신의 지은 바 선악의 업인에 따라 천도인도수라축생아귀지옥의 육도세계를 끊임없이 윤회전생(輪廻轉生)하게 된다는 뜻이다.”「원불교대사전」 


육도세계와 더불어 나에게는 하나의 지옥이 더해졌다. 그것은 ‘패션지옥’이다. 이대로 옷에 집착하고 옷이 만드는 환상을 좇다가는 이생의 끝에서 패션지옥에 빠지고 말 것 같다. 그리고 그 윤회전생을 되풀이할 테지. 패션지옥의 모습을 상상하면 옷에 대한 집착을 덜어낼 수 있을까? 정말로 패션지옥이 있다면 그곳에서 나는 어떤 고통을 받게 될까? 패션지옥에선 이생에서 내가 샀던 모든 옷을 한꺼번에 입어야 한다. 그 무게를 한꺼번에 짊어져야 하는 거다. 결코 덜어내거나 벗을 수 없다. 이생에서 내가 샀던 모든 옷이라고? 헉!!! 결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옷을 갈아입기를 무한 반복해야 할 수도 있다. 결코 멈출 수 없다.  아, 요건 오히려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꺼번에 입는 벌로 하자. 그게 더 무섭다.  아무튼 이 윤회에서 벗어나야겠다.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한 가지환상을 좇는 마음이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이를 무심이라고 한다인연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어렵게 이야기하면 망상분별이 없는 마음이다.”『왜 깨달음은 늘 한박자 늦을까_정화스님』 


나는 옷을 통해 어떤 환상을 좇는 것일까? 왜 이렇게까지 외모에 집착하는 것일까? 단지 예쁜 것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 예쁜 것 안에 예쁜 옷을 입은 내 모습이 포함될 뿐이라고 주장해 보자. 언젠가 “나는 타인과 상관없이 나 자신을 예쁘게 꾸미는 게 좋아.”라고 말했을 때, “만약 언니가 무인도에 혼자 살아도 그렇게 꾸미고 싶어?”라는 질문을 받았었다. 뭐 무인도까지 갈 필요도 없다. 주말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자. 내가 정말로 예쁜 옷을 입은 내 모습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 자유의 시간에 그것을 맘껏 즐겨야 하는 것 아닐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어떠한 방해도 없는 그 순간이야말로 나 자신을 맘껏 꾸밀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 아닌가. 그런데, 그 시간 동안 나는 전혀 꾸미지 않는다. 오히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날것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편안함을 느낀다.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혼자인 이때야말로 순수한 나의 욕망이 발현되는 순간이라고 보면, 단지 예쁜 옷을 입는 게 좋다는 나의 주장은 틀렸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옷을 사고 싶은 걸까? 옷이 필요하다는 말은 원천봉쇄다. 급격한 체중변화가 있기 전에는 여생까지 입을 충분한 옷을 이미 가지고 있으니 더 이상의 새 옷이 필요하지 않다. 나 스스로 좋아서도 아니고, 필요해서도 아니라면 타인을 위해 옷을 사고 싶다는 것이 남는다. 나는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들의 눈에 좋아 보일 옷을 사고 싶은 거다. '타인의 시선', 여기에 나의 망상분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옷차림은 그 사람의 경제력을 보여준다. 나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다.
이 걸 들키면 사람들이 나를 무시할 것이다.

허름한 옷차림을 하면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것이 나의 망상분별이며, 내 업의 정체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어떻게 이 업을 벗고, 패션지옥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욕망’이 아니라 ‘절제’의 문제가 아니냐고 묻는다. 그것이 욕망이든, 절제력의 부재이든 이제는 해결하고 싶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지금은 그 방법을 모르겠다. 


지난 1년 동안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먼저 공부를 시작한 도반과 선생님들의 수수한 옷차림과 화장기 없는 얼굴을 흉내 냈다. 그러고는 내 안의 욕망이 사라졌다고 믿었다. 그렇게 당위만을 좇으면 억지로 욕망을 눌러놓았을 때의 부작용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화장을 하고, 그렇게 통제 불능 상태로 사들인 옷들로 멋을 낸다. 확실히 교복 같은 옷을 입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설 때보다 출근길이 즐겁다. 아직은 그러하다. 이러한 내 마음은 언제나 같았는데 그냥 외면해 버렸던 거 아닐까? 그래서 억지로 눌러놓았던 용수철처럼 욕망이 튀어 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제,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자연스럽게, 화려한 옷과 얼굴 화장의 의미 없음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까지 억지스러운 흉내 내기는 멈추자. 다만, 옷을 사는 것은 어떠한 강제 장치를 동원해서라도 여기서 멈춰야겠다. 제발 멈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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