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는 달큰했다
오늘은 한자 수업이 있는 날이에요. 사실 수업을 기억해 낸 것은 오늘 아침이었어요. 당연히 한자 연습은 수척했고요. 정작 한번 휘갈겨 써내려 간 것이 고작이었어요. 그만큼 제 심장도 간동간동 불안해졌어요.
수업은 한자를 보지 않고 칠판에 판서를 해야 돼요. 한자 쓰는 순서도 정확해야 하고 유의어와 숙어마저도 알아야 해요. 헷갈리는 유사한 한자도 판서해야 되고요. 훈장이 헷갈리면 수강생은 더 혼돈을 야기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완벽하게 한자를 이해하고 가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주는 귀신한테 홀렸는지 한자수업 하는 것도 까먹고 있다가 오늘 아침 쪽지를 보고서야 알았어요. 사실 쪽지는 총무님이 적어도 하루나 이틀 전에 보내주었는데 이번에는 총무님도 까먹은 것 모양이에요.
한자수업 갈 때는 이슬비가 내렸어요. 무겁게 누르던 흐린 하늘이 북한산을 소리 없이 비에 젖게 했어요. 사실 오늘은 한자 공부를 온전히 준비하지 못한 것만큼 한자수업을 땡땡이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어요. 훈장이 땡땡이 칠 생각을 하고 참 웃기지요.
마침내 한자 수업이 시작되었어요. 저는 운을 뗐어요. '이렇게 구성지게 비가 내리는 날은 한자보다는 따스한 커피 한 잔이 떠오르지요?' 수강생들은 고개를 주억이면서 '그러면 오늘은 수업을 조금만 하고 차 한잔 마시러 갈까요' 하는 거예요.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요. 그러면 훈장의 무식이 탄로 나지 않아도 되잖아요.
오늘도 생각대로 어김없이 질문이 쏟아졌어요.
- 훈장님, 교재에는 '여섯 륙'으로 나와 있는데 왜 육순이라고 할까요?
- 아마 두음법칙이 적용돼서 그럴 거예요.
- 그러면 부산의 오륙도도 '여섯 륙'자를 쓰나요?
- 부산의 오륙도를 안 가봐서 잘 모르겠는데 옥편을 찾아봐야 될 것 같아요.
- 태극기의 기는 '그 기'자를 쓰나요?
- 아마 깃발 기를 쓸 거예요.
- 명복은 '어두울 명'자를 쓴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삼가 명복을 빕니다'에서 삼가도 한자인가요?
- 삼가는 한자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어요. '조심히 하다, 겸허하다'라는 순우리말로 알고 있어요.
- '겸할 겸'의 쓰기 순서가 헷갈려요. 다시 한번만 써 주세요
30여분이 지나고 '겨울 동'을 쓸려고 할 때였어요. '훈장님, 오늘은 수업 그만하고 차 마시러 가면 안 될까요?' 저는 '그럴까요?' 하면서 속으로 ' 휴 다행이다.' 했어요.
수강생과 함께 직장 안에 있는 찻집으로 갔어요. 수강생들은 한자를 알려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진심 어린 말을 했고. 저는 다 까먹은 한자를 다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까 오히려 제가 더 고맙다며 웃음을 거슬러 주었어요.
한 손에 두꺼운 한자 책을 들고 한 손에는 남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사무실에 들어오는데 어느새 비는 멈추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잇대어 들어온 햇살이 차분히 빈자리를 메꿔가고 있었어요. 어느새 제 마음에도 햇살이 들어 찰랑찰랑 했어요.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다짐했어요. 다음부터는 한자 연습에 좀 더 매진해서 명실공히 훈장님 다운 멋진 모습을 보여주어야겠다고요.
이렇게 한자 수업을 재능기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그저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