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정리 #4 아들맘
딸 둘에 아들 하나면 금메달
딸 둘이면 은메달
딸 하나에 아들 하나면 동메달
아들 둘이면 목매달
도대체 이 무시무시한 말은 누가 만들어낸 걸까.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둔 금메달리스트가 내뱉은 말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같은 부모로써 자식에 대한 마음을 이해한다면 다른 엄마들에게 저런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임신 12주차에 병원 정기점검을 갔을 때를 잊을 수가 없는데 초음파를 보던 주치의의 표정과 멘트가 인상적이었다.
동공에는 지진이 났고, "여기 뭐가 보이네요. 괜찮으시겠어요?"
'여기 뭐가 보인다'는 말은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소리.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는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난 정말 순진무구하게 '왜요?' 라고 물어봤는데 주치의는 그냥 웃어넘기며 살짝 남편을 위로해줬다.
머지않아 곧 이유를 알게 됐다. 뱃속에 있는 아기 성별을 알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괜찮겠어?"
아들 하나밖에 없는 나도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었는데, 아들만 둘 이상인 사람들은 오죽할까. 말귀 다 알아듣는 애들 앞에서도 서슴없이 할 말 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엄마는 아들 둘 손을 잡고 산책하는데 한 할머니가 보고는 아이들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이고, 니가 그걸 떼고 나왔어야지. 왜 달고 나와서 엄마를 힘들게하니."
엄마한테 이야기하는 것도 모자라 아이들한테까지 고통을 준다.
아들 엄마들은 말한다. 날 정말 힘들게 하는 건 아들인 내 자식이 아니라 걱정이랍시고 그런 말들을 내뱉는 사람들이라고. 저런 말을 듣고나면 아이에게 니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소중한지 꼭 표현하며 설명해준다고 한다. 혹여나 내가 뭘 잘못한걸까 생각하게 되고 상처 받았을까봐.
내가 그랬다. 어릴때 난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었다. 우리집은 언니와 나, 딸 둘인데 요즘에야 엄마랑 같이 다니니 보기 좋고 재밌겠다고 하지만, 어릴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그놈의 대가 뭐길래. 친척들이 하는 대화를 얼핏 듣고는 내가 부모님께 마치 뭘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언젠가 엄마에게 다 커서 물어봤는데, 엄마는 왜 그런 생각을 하냐고 깜짝 놀라셨다.
나는 우리 아들에게도 이런 생각, 이런 느낌조차 들게 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여아선호사상 시대?
현행 의료법상 임신 32주 이전에 의사가 성별을 부모에게 알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의료법 제20조(태아 성 감별 행위 등 금지)
① 의료인은 태아 성 감별을 목적으로 임부를 진찰하거나 검사하여서는 아니 되며, 같은 목적을 위한 다른 사람의 행위를 도와서도 아니 된다.
② 의료인은 임신 32주 이전에 태아나 임부를 진찰하거나 검사하면서 알게 된 태아의 성(性)을 임부, 임부의 가족, 그 밖의 다른 사람이 알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과거 남아선호사상이 지배적이었을 당시 제정된 법 조항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요즘은 보통 임신 12~16주 쯤이 되면 대략 성별을 알 수 있다. 병원에서는 여전히 성별을 명확히 언급하지 않지만, 딸이면 '엄마 닮았다', 아들이면 '아빠 닮았다'라고 우회적으로 알려주곤 한다.
우리 엄마때만 해도 출산하고나서 아이 성별을 알았다고 하니 과거에는 얼마나 더 금기시되었는지 알 수 있다. 생각해보니 어릴 적 보던 TV 드라마에서도 아이를 낳을 때 '공주님입니다', '왕자님입니다'라고 간호사가 말해주면 웅장한 음악과 함께 충격적인 배우의 표정이 나오곤 했었다.
이제는 남아선호사상이 많이 사라졌다. 그럼 이 법령도 좀 바뀌어야하지 않을까 싶지만, 요즘은 오히려 여아선호사상이 지배적인 듯 하다. 주변만 봐도 첫째가 아들인 엄마 보고 '딸 낳아야지' 한다. 물론 딸 있는 엄마 보고는 '아들 낳아야지' 하겠지.
어쨌든 딸 둘보다 아들 둘인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큰 건 사실이다.
아들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해준 경우는 딱 한 사례가 있었다.
"시댁에서 좋아하시겠네."
과연 내가 시댁 예쁨 받으려고 아들을 낳고 싶어 했을까? 뭐시 중헌디..
저는 정말 아들을 낳고 싶은데요
난 아들을 낳고 싶었다. 믿거나 말거나 둘째를 계획하게 된다면 또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기억은 안나지만 결혼이라는 걸 잘 모를 때부터 친정엄마한테 "난 나중에 아들 낳고 싶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들 성별로 확정되었을 때 엄마가 해준 이야기다.
막연하게 아들과 데이트하는 모습을 꿈꿨던 것 같다. 여전히 그런 생각이 든다. 출산하고 몸도 많이 바뀌고 외모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졌지만, 아들이 "엄마가 제일 예뻐"라고 말해주면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겠지. 별 것 아닐지 몰라도 나는 그 황홀함을 느껴보고 싶었다.
아이가 딸이면 딸인대로 좋았겠지만, 나는 나 스스로도 제대로 꾸미고 다니지 못하기에 내 딸이 추노처럼 다닐까봐 그게 염려스러워서 아들을 편하게 키우고 싶었던 것도 있다. 내 똥손이 아이의 외모를 망칠까봐. 실제로 아직도 머리 땋는 법을 모르고 고무줄로 포니테일 묶는 것도 잘 못한다.
또, TV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매주 챙겨보면서부터 딸 키우기가 조금 버겁게 느껴졌던 것 같다. 세상이 너무 흉흉하다. 요즘은 남자도 마냥 안심하고 다닐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릴 때는 엄마의 딸 걱정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해가 졌는데도 집에 안 들어오면 비상. 어디서 뭘 하는지 꼭 알아야 엄마는 성에 차는 것 같았다. 심지어 우리 언니의 새내기 대학시절 통금은 저녁 8시였다. 언니가 맞서 싸우고 투쟁해준 덕분에 나는 비교적 대학교를 순탄하게 다닐 수 있었다. (언니 고마워)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딸 낳으면 꼭 우리 부모님같을 것 같았다. 결혼 전에는 엄마가 왜 저렇게까지 할까 싶었지만, 애를 낳고 보니 엄마의 심정이 너무 이해가 되더라.
아들이든 딸이든
부모와 아이를 존중해주세요
글을 쓰다보니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다.
역으로 딸이 별로고 아들이 짱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사람마다 육아에 관한 그림, 개념, 가치관에 따라 원하는 성별이 다를 수 있고, 이는 서로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딸이어도 아들같이 무심한 사람도 있고 아들이어도 딸처럼 애교가 많은 타입이 있으니, 딸이든 아들이든 성별 자체보다는 성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 아이가 커서 엄마한테 재잘재잘 자기 이야기도 많이 하고, 데이트도 하고, 이런저런 연애 고민도 털어놓고. 그렇게 친구처럼 지냈으면 한다. 이걸 꼭 딸이랑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을까. 엄마가 어렵고 뭔가를 숨기고 싶은 대상이 아닌, 언제나 내 편을 들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 같은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주변에서 '아들이 좋다', '딸이 좋다'라고 이야기해준다고 한들 그게 부모 마음대로 되나? 왜 본인이 간섭하고 싶어하는지는 모르겠네.
부모와 아이를 존중해주고 그 둘의 관계는 그 둘이서 잘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한다. 어쨌든 아이를 가장 생각하는 사람은 부모일테니까.
"나는 아들 낳고 싶었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 안 믿는 사람, 지금 아들이 상처받을까봐 그냥 그렇게 말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아니고요. 저 정말 아들 낳고 싶었고 아들이랑 행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