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정리 #1 육아하는 남편
여자들에게 산후우울증은 놀랄 일도 아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약이겠거니 덤덤히 흘려보냈다. 임신 때부터 익히 들어와 마음의 준비를 어느 정도 하고 있었던 덕분인가. 물론 막상 우울감이 덮쳤을 때는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힘들었지만 그래도 경험자들의 도움으로 잘 지나간 셈이다.
그런데, 남자에게도 산후우울증이 있다고? 애는 내가 낳았는데?
국내엔 아직 정확한 통계치가 없지만, 미국의 한 연구기관이 최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신생아 아빠의 62%가 산후 우울증의 초기 단계인 베이비 블루스(Baby Blues)를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베이비 블루스를 겪는 산모 수와 맞먹는 수준(70%)이다. 이 현상을 경험하는 아빠들은 산모와 마찬가지로 신경이 예민해져 작은 일에 짜증을 내고, 갑자기 자신감을 잃고, 또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뉴욕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학센터 헨리 해리스 박사는 "베이비 블루스는 대개 두 주면 끝나지만 그 기간 동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생긴 부부갈등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면서 "아빠의 스트레스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조언한다.
[출처] 안혜리, 「아내만 産後 스트레스 있는 줄 아세요? 남편도 우울증 생겨요"」,『중앙일보 』,2002년 3월 22일 자, 종합 52면.
산후우울증은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데 알고 보면 남자도 여자 못지않게 출산·육아에 따른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아빠에게도 공감과 위로가 필요하다.
아빠가 되는 훈련은 녹록지 않다. 여성 산후우울증의 주원인은 갑작스러운 호르몬 변화이지만 남성의 산후우울증세는 환경 변화에 따른 스트레스·책임감 같은 심리적 요인이 주요 이유다. 젖병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고, 잠을 재우고 시시때때로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야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하면 자신감을 잃는다. 하고 싶은 일·계획을 미루는 생활이 반복되면 자유를 잃은 것 같은 상실감·압박감도 든다. 산후 첫 1년 동안 3~5%의 아빠가 산후우울증을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빠의 산후우울증세는 방치되기 쉽다. 아빠는 엄마와 달리 감정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한다. 아빠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출처] 이민영, 「초보 아빠도 엄마처럼 산후 우울증 나타날 수 있다는데,『중앙일보 헬스미디어』, 2018년 12월 10일, "https://jhealthmedia.joins.com/article/article_view.asp?pno=19883" (2021년 3월 18일 접속)
이 기사를 읽자마자 놀라서 남편에게 바로 카톡 했다. 혹시 오빠도 있었냐고. 혹은 있냐고.
웬만하면 없다고 할 사람인데, '우울증까진 모르겠으나 무기력했을 때가 있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그동안 나만 생각해서 남편을 정말 하나도 못 챙겼구나. 너무 미안했다.
나의 입장에서 변명을 조금 하자면, 집에서 하루 종일 아기와 둘만 있다 보니 남편의 퇴근시간만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남편이 육아를 도와줘서 한결 나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말을 할 줄 아는 성인', '대화가 가능한 사람'과의 만남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피곤했을까. 퇴근하고 나면 녹초가 되는데, 편히 쉬어야 할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와 아기가 기다리고 있다. 쉬기는커녕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아기 목욕시키고 재우고 쓰레기 버리고 정리하고... 거기다 아내는 내가 오늘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해낸다. 그럼 또 다 들어주고 고생했다며 다독여주기까지 해야 한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 좀비가 되어 있는 아내 앞에서 '나도 오늘 회사에서 힘들었어'라고 말하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다.
아기가 일찍 깨버리는 날이면 남편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출근해야 한다. 최대한 아내가 달래며 봐주려고 하지만 침실에까지 들리는 울음소리 때문에 남편은 잠을 계속 잘 수가 없다. 울음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누워있느니 결국 일어나 함께 아기를 보는 쪽을 택하고 만다.
우리 남편은 해당사항이 아니었지만 코로나도 한몫 톡톡히 했다. 코로나로 인해 안전하게 재택근무하라는 회사가 점점 많아지면서 아빠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집에서 일하자니 회사에서보다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거니와 일은 일대로 하고 또 육아에도 치어 허덕이는 아빠들이 짠했다. 신생아든 유치원생이든 초등학생이든 가정보육으로 다 집에만 있으니 아빠가 일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때문에 일도 하고 육아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내들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도 같은 입장이었지만 아내로서는 남편이 눈에 자꾸 보이니 뭐라도 하나 도와줬으면 싶었을 것이다. 나도 미치겠으니까.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일과 육아 모두를 함께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아빠들이 너무 안쓰러웠다.
임신과 출산이 엄마의 삶만 바꾸어놓는 것이 아니었다. 화사 퇴근과 동시에 집으로 출근하는 남편은 개인적인 약속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그야말로 세상과의 단절이었다. 우리 집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하나 만들어졌고 우리는 매일 서로의 얼굴만 보고 살았다. 코로나고 나발이고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잘 모르겠더라.
그러면서도 남편은 힘든 내색을 하거나 아기한테 찌푸린 얼굴로 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체중은 자꾸 줄어들고 잠도 제대로 못 자 피부도 뒤집어지고 먹는 것도 시원찮았다.
하지만 아기한테 만큼은 정말 최선이었다. 새벽에 아기가 잠투정을 해도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달래는데..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는 안다. 정말이지 나도 잠을 못 자 허덕이니 아이에게도 예민해지는 날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신생아 육아를 하면서.. 왜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남편이 힘든지 안 힘든지 생각할 틈 조차 없었다는 건 너무 비겁한 핑계같이 느껴졌다. 아기를 키우면서 산후우울증이라고 말하기엔 과한 측면이 있더라도, 삶이 무기력해지고 기운이 없어지는 현상은 누구나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육아가 이렇게 힘들다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절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남자의 산후우울증은 아직까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대처가 더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아빠가 산후우울증을 겪는다는 것은 그만큼 아기를 사랑해서 많이 봐주고 육아에 관심이 많아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맙고 또 고맙다.
자유부인 시간, 일명 자부 타임만 노릴 것이 아니라, 남편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자유 남편 타임, 자남 타임을 자주 줄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다. 늘 우리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는 우리 남편,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