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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라 Jun 08. 2022

퇴사의 이유, 절대 '육아'여서는 안돼

서른이라 좋겠다 #5

분명 육아휴직 후 복직 당시 나의 자세는 화려한 워킹맘으로서 회사를 다 씹어먹어 버릴 것 같은 기세였으나,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퇴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의 늦은 등원 시간 및 이른 하원 시간

반대로 나의 이른 출근 시간 및 야근, 늦은 퇴근 시간

코로나로 인한 잦은 어린이집 긴급 하원 명령

저녁 육아를 맡아주시던 시어머니의 체력

남편의 육아 지분 90%로 인한 잦은 갈등

점점 더 심화되는 아이의 인지 및 정서 발달 등


이것들이 퇴사를 고민하게 된 내적(집안) 이유다. 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출퇴근 시간이 꽤 걸리는 거리에 있는 나보다는 회사가 집과 가깝고 상대적으로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남편이 출동하게 되었다. 남편은 본인의 희생이 어느 순간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수 있다. 또 갑작스러운 긴급 육아와 제시간에 처리되지 못하는 회사 업무의 압박 속에서 남편에게는 휴식이라는 게 너무 없었다.


외적으로는 '회사'가 요인이 되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답답한 회사 분위기, 이 안에서 보이지 않는 나의 미래, (코로나 시국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느껴지는 회식에 대한 압박, 잦은 야근 등이 있겠다. 이 이야기로만 2박 3일 밤낮으로 수다 떨어도 부족할 테지만, 굳이 글로써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언급하며 고통을 상기시키고 싶지는 않다.


뭔가 결정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나도, 우리 가족도 모두가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몸과 정신이 피폐해지고 육아, 일 둘 중 무엇 하나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아예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 하나는 확 포기해버리든가,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으면 실눈 뜨고 다 대충 하든가 해야지.


스스로 당황스러웠던 이유 중 하나가 내가 무언가에 대해 길고도 깊게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도 식장, 드레스, 스튜디오 모두 한 번에 정해버릴 만큼 고민이라는 건 딱 질색인데, 이건 정말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내가 회사에 대한 애정이 컸던 걸까. 아니면 그냥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가 두려웠던 걸까.


사실 대학시절 나에게 이 회사는 꿈의 회사였다. 면접 합격 전화를 받고는 정말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대학 입시 때보다도 더 흥분되고 짜릿했던 것 같다. 퇴사를 고민하면서 수십 번은 그때의 감동이 떠올랐고 그 감정은 나를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행복했었지, 너무 좋아했었지, 꿈을 다 이뤘다고 생각했었지.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이 심화될수록 심리적 고통은 커져만 갔고, 음주에 취미도 재능도 없는 나는 술이 없으면 편안한 잠을 이루기 힘든 지경까지 다다랐다. 급기야는 주종을 따지지 않고 혼술을 일삼기 시작했고 눈물로 매일 밤을 지새웠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을 제대로 해보기로 했다. 내가 퇴사를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둘 다 병행하는 것이 맞는가를 냉정하게 판단해보기 위해 엑셀 표로 나의 현재 상황 및 미래 계획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계속 재직할 경우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퇴사를 선택할 경우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재직 중 나의 삶, 퇴사 후 예상되는 나의 삶

재직을 한다면 고민해볼 수 있는 해결책

이 해결책은 근본적인 것인가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인가



대충 이랬다. 어쨌든, 내가 피하고 싶은 건 아이를 핑계로 퇴사하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육아가 퇴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고 꽤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 퇴사의 이유가 '육아' 이 한마디로 정의되어버린다면, 나중에 꼭 아이 탓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너 때문에 뭘 희생했는데, 내가 너 키운다고 직장까지 때려치웠는데 넌 어쩜 나에게 이럴 수 있니. 언젠가 이런 말들을 아이에게 쏟아붓게 될까 봐 절대 싫었다.


그런데 현재 상황을 따지려 하니 육아가 전혀 개입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연히 차지하는 포션이 상당히 컸다. 그래서 아이와 관련된 것은 모두 떼어내고 한 번 더 살펴보았다.


이 회사를 계속 다님으로 해서 생기는 긍정적 효과와 대신 내가 포기해야 할 것들

회사를 다니지 않고 내가 자발적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

도전해볼 만한 다른 것이 있는가

이직인가 새로운 도전인가

둘 다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이야기인가

퇴사가 오히려 가족에게 더 부담을 주지는 않는가


오랜 고민 끝에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남편에게 의견을 전달했을 때, 남편은 계속해서 다시 생각해보기를 권유했다. 육아란 엄마 아빠 공동의 책임인데, 내가 큰 희생을 치러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급기야 나중에는 "나 괜찮다니까! 그만 물어봐!"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이만큼 내가 신중하게 선택하기를 원했다. 나와 같은 심정 아니었을까. 내가 혹여나 가족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정을 하게 될까 봐. 사실 입사 당시 나는 이 회사에 대한 간절함이 컸고 남편은 이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 과정을 통해 비로소 내 고민은 끝이 날 수 있었다. 아이가 꼭 아니더라도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나만을 위한 현재와 미래에도 퇴사가 좋은 선택인지를 따져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마음이 떠난 회사로의 다시는 없을지 모르는 이 출근길이 아련하다가도 또 화나는 상황을 직면하고 나니 퇴근길이 후련하기도 했다. 결정을 내리고 회사에 퇴사를 통보한 후에도 나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인생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니까.




내가 마치 무언가를 끝낸 것 같지만, 나는 동시에 계속 무언가를 새롭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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