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라 좋겠다 #4
출산 후 16개월, 난데없이 바디프로필 촬영을 예약했다.
바쁜데 너무 지루했다. 분명히 몸은 인생 통틀어서 가장 바빴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쓰고, 하필이면 회사에서 가장 바쁜 부서로 복직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려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솔직히 남편과 시어머니가 육아의 8할이라 할 수 있지만, 엄마가 해야 하는 '최소한의 일'들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수월하게 아이를 등원시키고 출근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린이집 갈 준비를 다 해뒀어야 했고, 오후에 어머님께서 하원 후 아이를 편하게 봐주시려면 장난감 정리, 빨래, 설거지 등이 잘 갖춰져있어야 했다.
회사에서는 적응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복직하자마자 하루빨리 일에 대한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는 각오는 되어있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새 부서로 배정되면서 난생처음 보는 주제의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이다. 내 팔자에 이런 걸 보고 있게 될 줄이야. 외계어 천국, 아니 지옥이었다.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가 현실이 되었다. 밤낮으로 일을 붙잡고 있자니 육아도 일도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느낌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인생이 무료하고 지루했다.
핵노잼.
수험생 때는 열심히 공부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고, 대학생활하면서는 여행, 대외활동, 취업준비 등 항상 무언가 '목표점'이 있었다. 그러다 직장인이 된 이후로 목표를 상실한 채로 뜨뜻미지근하게 흘러가는 대로 그저 살아가고 있는 기분. 성취감이라는 것을 느껴본지가 오래되었다. 결혼, 출산이 목표이자 성과물이라고 할 순 없지만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니 그 기분이 더 진해졌다.
목표라는 것이 있어본 지가 오래되다 보니 내 끈기, 인내심조차 바닥나는 것 같았다. 소소한 취미생활조차도 금방 질려버린달까. 육아 때문에 바쁘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 보지만, 사실 TV 볼 시간은 있고 인터넷 서핑할 시간도 넘쳐난다. 졸음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도 어떻게든 두 눈을 부릅뜨고 핸드폰은 보고 싶어 하니까. 친구들과의 육아 근황 토크는 절대 빠질 수가 없으니까.
아. 일단 마음가짐을 다시 시작해볼 필요가 있었다. 주어진 목표가 없다면 내가 세팅하면 되지. 그게 꼭 거창할 필요가 있을까. 크지 않더라도 분명하기만 하면 된다. 어렵게 가지 않고 가장 간단하고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이를 통해 다시 한번 '나는 여전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인내심과 끈기만 있으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는 '다이어트', 다시 말해 '몸만들기'에 돌입한 것이다.
나의 끈기와 인내를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116일 간의 바디프로필 준비 기간 동안 나의 생활 루틴을 종합해보자면 대략 아래와 같다.
am 05:50 기상
am 06:30 출발
am 07:30 필라테스
am 08:45 회사 출근
pm 07:00 회사 퇴근
pm 08:00 육아 출근
pm 09:30 육아 퇴근
pm 10:30 집안일 및 잠잘 준비 완료
pm 11:00 다음날 식단 도시락 준비 완료
am 00:00 남편과의 일상 공유 및 휴식
am 01:00 취침
보통 바디프로필을 준비하면 아침저녁으로 하루 2회 이상 운동하곤 한다. 그러나 워킹맘은 운동할 시간을 내기가 참 힘들다. 그래서 어차피 아기가 자고 있을 '새벽 시간'에 운동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또 PT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필라테스로만 하다 보니 운동시간과 운동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식단을 더 타이트하게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탄단지 비율이 어떤지, 같은 탄수화물이라도 어떤 건 되고 어떤 건 왜 안 되는지, 단백질이 얼마나 중요한지, 왜 식사를 쪼개서 여러 번 나눠해야 하는지 등등. 여자들이라면 실천은 몰라도 이론만큼은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대부분이 자부하고 있을 텐데, 내가 몰랐던 진짜 식단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덕분에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도전해본다는 느낌이 운동보다도 식단에서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워킹맘이라 가능했던 바디프로필
바디프로필 끝난 후 인스타그램에 결과물을 공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워킹맘이 어떻게 했어?'라고 물어왔다. 하지만,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워킹맘이라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육아맘은 더 힘들 것 같다.
육아휴직을 경험하고 보니 직장인의 큰 장점은 '적어도 식사시간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식단은 식사시간이 아주아주 중요한데, 아이를 보면서 어떻게 내 끼니를 따박따박 챙겨 먹을 수 있겠는가. 삼시세끼를 챙겨 먹는 게 문제가 아니고 바디프로필 식단은 2시간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먹어야 했다. 하루 종일 아이를 키우면서는 절대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 다니지 않고 아이를 키우면서 바디프로필에 성공했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분께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박수 쳐주고 싶다.
그러나 흔히들 치명적인 바디프로필의 단점으로는 빵, 떡볶이 같은 정제된 탄수화물을 못 먹으니 '성격이 나빠진다'라고 한다. 재밌는 농담이지 않냐면서 남편에게 말했는데, 웃지 못하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남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성격이 많이 나빴구나. 미안 아들, 미안 남편.
절대 두 번은 못 하겠고,
한 번 조차도 안 해봐도 될 것 같다
인내심 테스트라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던 바디프로필이지만, 도전한 지 50~60일 정도쯤 되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장에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동안 한 것이 아까워서 어떻게든 끝까지 달성하긴 했다.
어쩌면 코로나 시국이라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아이 때문에 더 조심하느라 어차피 사적 모임이 거의 없었고, 회사에서 식사도 혼자 먹거나 소수의 팀원들끼리 배달, 테이크아웃을 애용해왔다. 회식이 없었던 것도 큰 역할을 했다. 타의에 의해 불가피하게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보니, 준비를 꾸준히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수한 환경에서 수월하게 잘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두 번은 못 하겠고 한 번 조차도 안 해도 될 것 같다. 18~39세 여자 평균 체지방률은 18~26%라고 하는데, 놀랍게도 체지방률이 18% 아래로 떨어지고 나니 월경이 끊겼다. 필라테스 강사는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대회 준비하는 여자들은 실제로 몇 달 동안 무월경이라고.
바디프로필 촬영하고 나면 바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글쎄. 규칙적인지 불규칙적인지 따져보기에는 아직 그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호르몬이 얼마나 중요한지, 왜 '평균 체중', '평균 체지방률'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애초에 목표했던 '인내심, 열정 자가테스트'는 성공적이었고 무엇보다도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므로 후회는 없다. 그런데 사전에 바디프로필 부작용에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고, 무엇을 집중해서 잘 조절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공부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냥 심신의 건강을 위해, 먹고 싶은 거 적당히 잘 먹고, 운동도 적당히 잘하고, 적당히 부지런하면서 적당히 게으르게 사는 것이 최고다.
저녁 9시 30분에 당근케이크 퍼먹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