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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라 Apr 24. 2023

기혼의 로맨스

서른이라 좋겠다 #8

머리도 다 말리지 못한 채 헐레벌떡 집을 뛰쳐나온다. 회사에 지각하지 않으려면 7분 뒤 들어오는 지하철을 꼭 타야만 한다. 이 긴박한 상황에 화장은 무슨. 파우치만 대충 가방에 쑤셔 넣고 냅다 달린다. 간신히 지하철 탑승에 성공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적 평온을 되찾는다. 마스크를 쓴 채로 맹렬히 질주했더니 눈 아래 얼굴이 땀과 습기로 가득 찼다. 그래도 몰골이 크게 걱정되진 않는다. 여기 뭐 예쁘게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새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온다. 아침에 가방에 쑤셔 넣었던 파우치를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하루 일과는 오전 7시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오후 6시가 넘어서야 화장을 한다. 4시간 정도 후면 지워질 얼굴이지만 정성스레 찍어 발라 본다. 마스크를 쓰니 별로 티가 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착각. 옆 자리에 앉은 직원이 말한다.


“퇴근하고 약속 있으신가 봐요.”

“아뇨, 바로 집으로 가요.”


나는 귀갓길에 화장을 한다. 이 찌든 얼굴이 회사 사람들이나 대중교통의 불특정 다수에게 보이는 건 괜찮아도 남편에게만큼은 싫다. 물론 주말이 되면 영락없는 자연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한 번씩 이렇게 마음을 다잡는다. 괜히 집에서 입는 옷도 한 번 돌아보게 된다. 목이 늘어난 티, 무릎 튀어나온 추리닝. 너무 이런 옷들만 입는 것 같아 스스로에게 긴장감을 줘보기로 한다. 누가 볼까 싶지만 괜히 예쁜 잠옷 세트도 사고, 해진 속옷도 버리고 새로 마련한다. 편하기만 한 거 말고, 불편하지만 좀 예쁜 걸로. 어디 딱히 하고 갈 곳도 없는 것 같은데 요즘 유행하는 핫한 패션템도 사본다.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을 때였다. 영락없는 아이 엄마가 된 우리는 평일 낮에 아이들 모두 등원시키자마자 카페로 집결했다. 각자 육아전쟁을 치르며 살다 보니 이렇게 만난 것도 오랜만이다. 풋풋한 젊은 커플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인생에는 더 이상 로맨스가 없지 않냐며 목이 터져라 한탄하던 중 문득 한 친구가 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 나의 모습을 그림 그리듯 꺼내주었다.


“너 그때 정말 정말 행복해 보였어. 사람의 표정이 그럴 수 있구나 싶었어. 사랑에 푹 빠지면 사람이 저런 모습이구나. 결혼은 그런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랑 해야 하는구나 싶었어.“


아 맞아. 나 그랬었지.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명할 만큼 똥손에 패션 센스도 전혀 없었을 당시 남편을 처음 만났다. 이 사람에게 너무 잘 보이고 싶었는데 내 손이 따라주지 않음에 절망을 느끼고 데이트가 있을 때마다 미용실에 갔다. 아무리 거울을 봐도 부족해 보였고 더 예뻐 보이고 싶어 팔자에도 없는 뷰티블로그를 밤낮으로 뒤져봤던 것 같다.






올해로 결혼 7년 차. 아직도 두근거리고 설렌다면 내 심장 건강 상태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주변에서 농담처럼 이야기한다. 미국 코넬대학 하잔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사랑의 유효기간은 900일이라고 한다. 여러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 보아도 아무리 사랑이 불타올라도 보통 1년 6개월에서 3년 사이에 끝나버리고 만다고 한다. 그럼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중년 부부들은 '정'으로만 함께 사는 걸까. 그렇다고 다른 데서 사랑을 갈구할 수도 없는 일인데 그럼 너무 슬픈 이야기가 아닌가. 인생에 있어 사랑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실은 너무 슬프고 절망적으로 다가왔었다. 20대엔, 언젠간 사랑이 없어질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과연 결혼은 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도 들었다.


현재 남편을 만난 지 9년 째, 아직도 남편에게 설렌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연애할 땐 그 설렘이 기다란 선 같았다면, 지금은 스타카토 점같이 문득 순간순간 설렌달까. 남편과 처음 연애할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기를 낳고는 한동안 설렘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설렘을 느낄 시간조차, 기회조차 없는 느낌이었달까. 남편, 아기와 함께 외출하면 늘 누군가의 손에는 유모차 또는 아기손이, 다른 한 사람의 손에는 기저귀가방이 붙들려 있었다. 하루하루 육아 전투에 참전하다 보니 '전우애가 생긴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나쁜 건 아니었지만, 예전 육아 선배들이 '사랑이 어딨어? 찐한 우정 가지고 사는 거지'라던 말들이 현실화되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쩌다 보니 단 둘이서 외출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두 손은 정말 오랜만에 자유로워졌고, 새로운 역할을 하기에 좋았다. 다정다감하게 문을 열어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어깨에 손도 올려주고, 아이 손이 아닌 내 손을 잡고, 아이 식기가 아닌 내 수저를 챙겨주고. 연애 때는 자연스럽고 당연했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들이었다. 쑥스러워 티는 내지 않았지만, 짧은 데이트 시간 동안 오랜만에 기다란 점선처럼 설렘을 느꼈다.


어찌 보면 새로운 연애에 대한 갈증이라기보다는 소소한 변화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이 구 씨에게 그런 말을 했다.


"편의점에 갔을 때 내가 문을 열어주면 '고맙습니다' 하는 학생 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 떴을 때 오늘 토요일이지? 10초 설레고. 그렇게 하루 5분만 채워요. 그게 내가 죽지 않고 사는 법."


조금 결이 다르긴 하지만, 나도 나를 위한 작은 로맨스를 위해 하나하나씩 설렘을 모아 보기로 했다. 차에서 아이가 잠들면 굳이 조수석 짐을 옮겨서라도 남편 옆에 앉아본다. 단발머리가 조금 끌리지만 긴 머리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예쁘게 다듬기만 해 본다. 취미생활을 함께 해보자는 남편의 제안에 남편이 즐겨하는 테니스를 배워본다. 종종 싸주는 남편의 도시락 뚜껑에 간단한 편지를 남겨본다.






기혼의 로맨스에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듯하다. 그렇지만 오히려 방법을 찾는 것은 더 쉽다. 부부인만큼 서로의 취향, 가치관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 히든카드다. 나는 내가 바라는 남편의 모습을 내 스스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남편이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반한 것이다. 물론 잘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의 기대치만큼의 반응이 없거나 결과가 예상과 다를 때. 자존심이 다치기도 하고 짜증도 나지만 뭐 어때. 평생 함께 할 사람인데. 재고 따질 게 없어서 좋다. 실패하면 다시 또 해보면 된다.


그런데 문득 남편도 같은 생각인지 모르겠네.


오빠, 오빠도 가끔 설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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