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수를 끝내며
나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한 해였다.
나는 일의 성취감이 삶의 원동력이었다. 대학교를 다시 가고, 또 다른 꿈으로 많은 활동을 했다. 빵빵한 포트폴리오를 인정 받으며 좋은 기업에서 좋은 복지를 받으며 일했던 28살이었고, 앞으로 창창한 앞날만 남아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까지 노력해온 결실이 맺어지는 것같았다. 그렇게 29살을 맞이했다.
평일도 주말도 없이 일했었다. 계약직이었던 나에게 너무 큰 일이 주어졌지만 해내기위해 진짜 많이 노력했었다. 코로나로 인해서 재택을 했었고, 낮밤없이 일을 했었는데, 처음 생각했던 일보단 다른일로 채워져가다보니 퇴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엔 나를 키워주겠다고 하던 사람을 믿고 들어갔었다. 보기좋게 배신당했다. 부당한 상황들이 펼쳐져도 한마디 못했다. 두번짼 내 연봉부터 깎아버렸다. 계약직으로 받던 연봉보다 낮았지만 그래도 일을 배우겠다고 생각해 들어갔었다. 결국 말 같지 않은 텃세와 정치질로 나오게되었다. 세번째 말도 안되는 야근과 업무 요구를 해놓고 업무시간이 부족하다고 한번의 경고도 없이 한달의 유예도 없이 나를 쫓아냈다.
남들은 1년에 한번 할 까 말까 하는 이직을 숨쉬듯 반복한 나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나를 감쌌고 더 이상 의지도 돈도 시간도 모두모두 남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런일이 벌어진걸까라는 생각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지원서를 넣은 곳도 얼마나 많은지 포트폴리오는 얼마나 많이 붙잡고 수정해왔는지
심지어는 인터넷도 사기를 당했고 이사한 집은 외풍이 너무 심해 기르던 식물들이 대부분 얼어 죽었기도 하고 에어컨은 사용할 수도 없게 곰팡이가 엄청 생겨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 집주인과 논쟁을 하기도 했다.
연초에 신년운세를 본적이 있는데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재물운도 없고 연애운도 없고 내가 가진 모든것을 잃게 될 것이다.' 였다. 말도 안되는 희망없는 메세지에 웃으며 넘어갔는데, 매번 매번 무슨 일이 생길때마다 다시 생각나곤 했다.
아홉수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말하던 사람도
죽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 대단한 시기라고 말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 중 가장 힘이 됐던 말은
보릿고개에 아이들이 많이 죽는다는 이야기였다. 보릿고개가 심할수록 다음해엔 풍년이 든다는 속설인데 왠지 지금 죽으면 풍년에 즐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것이 억울했었다. 내가 힘든만큼 보상 받고 싶었다. 그 이후 계속해서 외치던 말은 '살아남자' 였다. 살아남아서 그 풍년을 맞이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