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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2. 2024

23. 끝없는 직선 길, 메세타 고원(4월 27일 목)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Carrion de los Condes ~ 레디고스 Ledigos       

  안개가 많은 새벽은 또 다른 환상적인 느낌이 들고 해가 떠오르는 모습도 오늘만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뜨거워지기 전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오전 내 부지런히 걸었다.

  적당한 곳에서 쉬는데, 근처에서 쉬던 순례자가 우리에게 다가오며 빵을 내밀었다. 한참을 가야 마을이 나오는데 배고프면 먹으라고 했다. 고맙지만 먹을 게 있다고 하자 그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멀어 아침을 안 먹고 출발했다면 굉장히 배가 고플 수 있는 시간이어서, 그 순례자는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나눠준 거였다. 오늘 만난 첫 번째 천사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일직선으로 뻗은 길을 걸었고 그 양옆은 모두 밀밭이다. 17~18km 일직선 길을 걸은 후에야 마을이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넓은 땅이다. 낮에 일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거의 모든 농사일은 자동화되었고 이른 새벽에 스프링클러가 돌거나 약을 치는 기계들이 움직였다.

  마을이 보이자마자 바(bar)를 찾아 들어갔다. 유리컵에 주는 카페 콘 레체는 처음인데 양도 많고 굉장히 맛있다. 커피 한 모금에 온몸은 반응하며 새로운 힘이 났다.

  그곳에서 그동안 얼굴 익히고 남편과 주먹 인사까지 하며 지내던 노인 순례자를 또 만났다. 그 순례자는 말 못 하는데 우리도 스페인어를 못하니 어차피 마찬가지다. 

  그는 무릎이 아파 오늘은 더 걸을 수 없어 그곳에서 쉬고 내일 출발할 계획이라고 했다. 남편은 어제 약국에서 샀던, 무릎 아픈 데 먹는 약을 나누어 주었다. 그 순례자는 좋아하며 내일 사하구에서 꼭 보자고 했다. 나는 못 알아보고 있었지만, 우리 남편도 천사였다.  

   

  다시 일직선 도로를 걸어 목적지 레디고스에 도착했다. 이곳도 알베르게를 제외하면 식당은커녕 가게조차 없다. 순례자들이 없다면 진작 폐허 되었을 지역처럼 보였다. 

  나는 얼마 전까지 추워서 덜덜 떨며 감기로 고생했는데 지금은 온몸에 땀띠인지 알레르기 반응인지 붉은 점들이 났다. 간지러워 자꾸 긁을수록 피부는 점점 붉게 부풀어 올랐다. 하룻밤이라도 편하게 쉬어야 할 것 같다며 남편은 사립 알베르게(El Palomar Hostel) 이인실을 예약했다. 오늘 머문 알베르게는 주택 몇 채를 개조해서 만든 곳이었고, 넓은 마당과 휴식 공간이 있어 마음에 들었다. 스페인 시골 주택 체험 같다.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바(bar)에서 돼지고기 꼬치와 맥주를 먹었다. 돼지고기 꼬치는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았지만, 맥주를 큰 잔으로 마셨더니 식사 비용이 꽤 나왔다.

  점심 겸 저녁 식사 후 마당에 있는 흔들 그네와 해먹에서 햇볕도 쬐며 여유를 즐겼다. 이인실이라 짐을 다 펼쳐놓고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옷도 편하게 입고 쉬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몸에 난 땀띠(?)도 가라앉고 내일 아침에 걸어갈 새로운 힘이 날 거라고 주문을 외워본다.        

             

들판만 보이는 직선 길이 17~18km씩 이어지는 메세타 고원의 규모는 순례길을 걷기 전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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