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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2. 2024

22. 단체 순례자 트렁크로부터 튄 불똥(4월 26일)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프로미스타 Fromista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Carrion de los condes      

  오늘 이동해야 하는 거리는 짧고, 평지로만 이루어져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마을을 벗어나 걷다 보니 해가 떠오르며 주위가 밝아왔다. 가슴 설레도록 아름다웠다.

  날씨가 좋아, 적당한 곳에서 준비한 간식을 먹고, 신발도 벗고 쉬었지만, 카페 콘 레체 생각이 간절해서 바(bar)가 나타나기만 고대했다. 10km 이상 걷고 나서야 바(bar)가 나타났고, 카페 콘 레체, 소시지, 방금 만든 또르띠아를 샀다. 힘들게 걷다가 쉬면서 맛있는 커피와 음식을 먹으면 행복해지고 다시 힘이 난다.                                                            

순례길 필수품 카페 콘 레체(밀크커피)와 함께 먹은 소시지와 또르띠아

  잘생긴 점잖은 개와 함께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 배낭을 메는 대신 수레를 만들어 끌고 다니는 노부부 순례자 등 다양한 순례자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끝이 없는 일직선 길을 걸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가 높아지며 뜨거웠다. 파란 하늘에 있는 하얀 구름은 환상적이다.      


  해가 아주 뜨거워지기 전에 목적지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 도착했다. 가려고 마음먹은 알베르게(Centro del Espiritu Santo Pilgrims Hostel)는 예약받지 않는 곳이지만 우리는 일찌감치 도착했고, 또 못 들어가도 이 지역에는 알베르게가 많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았다. 수녀님들이 운영한다고 하는 알베르게 마당은 넓었고 건물도 좋아 보여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체크인 순서를 기다렸다. 

  우리 차례가 되어 의자에 앉자마자 봉사자는 마구 화를 내며 스페인 말로 속사포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우리는 알아듣지도 못하고 너무 놀라 얼이 빠졌다. 정신이 멍했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스페인 말을 하는 순례자는 우리를 변호하는 듯 말하고 봉사자는 계속 화를 냈다. 

  상황을 정리하면 이런 것 같다. 한국인 단체 순례자들이 배낭도 아닌 여행 캐리어를 택배로 알베르게 마당에 쏟아놓았다. 택배를 두는 지정된 장소도 아니었고, 단체로 여행하는 듯한 모습이 순례자 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봉사자는 화났다. 그때 마침 우리가 체크인하려고 앉았고 한국 사람이라 우리에게 화를 낸 것 같다.

  봉사자는 우리가 그 단체와 상관없고 스페인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도 계속 화를 냈다. 어쨌든 우리를 변호하고 대변했던 순례자의 무마로 체크인하고 침대보를 받았다.

  절차대로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받고 숙박비도 냈지만, 봉사자(수녀)는 아무런 안내도 안 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우리를 변호하던 순례자를 보며 체크인하라고 했다. 

  그 순례자는 우리 먼저 안내하라 하고, 봉사자는 체크인 먼저 하겠다고 하며 둘 사이 실랑이가 시작되더니 언성까지 높아졌다. 우리는 너무 곤혹스러웠지만, 상황도 정확히 모르고 스페인 말도 못 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소란스러움에 또 다른 봉사자가 오더니, 남편을 밖으로 밀어냈다. 나도 떠밀렸지만, 체크인하고 받은 일회용 침대보를 흔들고 버티며 의자로 가서 앉았더니 끌어내지는 않아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우리에게 화풀이하는 건 부당하다며 순서대로 안내해 주라던 순례자와 봉사자 사이 대화가 점점 격해지더니 급기야 봉사자는 그 순례자에게 나가라며 순례자 여권과 돈을 던지듯 되돌려주었고, 순례자도 화를 내며 배낭과 스틱을 챙겨 나갔다. 우리를 대변했던 그 순례자는 쫓겨났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고 난감했다. 

  봉사자는 불친절한 태도로 방을 안내했고 방 이외 어떤 시설에 관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침대를 배정받았지만, 택배로 보낸 배낭이 도착하지 않아서 밖으로 나왔다.      


  가지고 있던 유로를 거의 다 써서, ATM기에서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유로를 찾았다. 환율이 어마어마하게 높고 수수료도 비쌌지만, 낯선 외국 ATM기에서 유로를 찾은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었다. 지갑이 두툼해진 남편 어깨와 발걸음에는 힘이 들어갔다. 

  슈퍼마켓에서 먹을 것도 사고, 약국에 가서 남편 무릎 통증 약도 샀다. 큰 도시라서 그런지 약국에 들어가려면 마스크를 써야 했다. 바(bar)에서 시원한 맥주도 한 잔 마시고 돌아오니 배낭이 도착해 있다. 

  우리나라 단체 순례자가 하나둘씩 도착했고, 아무 일 없는 듯 인솔자 도움으로 침대 배정받고, 여타 순례자와 다를 바 없이 씻고, 빨래하고, 장 보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천주교 신자들로 종교적인 목적으로 순례한단다. 

  우리는 봉사자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시설에 대한 안내를 못 받았지만 알아서 잘 지냈다. 어쨌든 알베르게 시설은 좋았고 특히 침대가 모두 일 층이고, 침대 옆에 개인 탁자도 있어 물건 올려놓기도 편했다. 

      알베르게에서 쫓겨난 그 순례자는 어느 숙소에 머물고 있을까?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이 나를 휘감는다.                                  

끝없는 들판만 펼쳐지는 메세타 고원에 우뚝 서 있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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