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백 Feb 02. 2024

21. 여유로움을 배우며 (4월 25일 화)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 프로미스타Fromista      

  어제 우리가 머물렀던 공립 알베르게 산 에스테반은 다른 곳과 달랐다. 방이 하나밖에 없는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다른 공립 알베르게보다 더 저렴했고, 순례자들이 편하게 머무르도록 하려는 운영자 의지가 느껴졌다. 

  손 빨래하는 순례자에게 아주 유용한 탈수기가 있고 빨래집게도 충분했다. 주방에 빵, 잼, 차 등이 있어 마음대로 먹고 자유롭게 기부하면 되었다. 우리는 따로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서 알베르게에 있는 음식을 이용하지 않았지만, 새벽에 많은 순례자는 주방 음식으로 아침 식사했다.      


  새벽 6시경, 낡은 옷을 입은 나이 많은 순례자가 알베르게 물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사용하고 씻어놓은 그릇을 찬장에 넣고, 카펫을 끌고 나오더니 먼지를 털었다. 주방에 있는 음식으로 아침 식사하고 기부금 대신 봉사하는 것 같았다. 이런 게 순례자 정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이 알베르게에 함께 머물렀던 순례자들도 특별했다. 대부분 순례자가 일찍 일어나 준비해서, 우리도 짐을 싸느라 나는 소리 신경 쓰지 않고 침대 근처에서 편하게 배낭을 꾸렸다.

  어두운 새벽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길은 언덕으로 이어졌고 꼭대기에서 뒤돌아보니 어둠 속에 우리가 떠나온 마을이 보이고 마을 뒤로 동이 텄다. 아름다웠다.        

 

함께 머물렀던 순례자 대부분이 일찍 일어나 아침 먹고 출발 준비해서 우리도 편하게 준비하고 출발했다.

  구름 많고 흐려 걷기 좋았다. 끝없는 들판, 나무도 거의 없는 길을 걷고 또 하염없이 걸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넓은 평원이 이어졌다. 

  멀리 나무가 줄지어 있는 곳이 보였다. 강이 있을 거라는 남편 말에 가까이 가보니 정말 강이었다. 강물에 비치는 구름과 나무 그림자는 환상적이다.

  목적지 프로미스타 가까이에서 카스티야 운하를 만났다. 운하 물길, 하늘, 주변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운하를 따라 운행하는 작은 유람선도 있다. 순례자뿐 아니라 운하를 구경하려고 온 관광객도 많았다.     

         

카스티야 운하 물에 비친 나무, 건물, 하늘 그림자는 환상적이다.

  일찍 출발하고 부지런히 걸은 덕분에 기온이 오르고 해가 뜨거워지기 전 프로미스타에 도착했다. 근처 슈퍼마켓에서 먹을거리 사서 예약한 알베르게로 갔다. 대문은 잠겨있고 오후 2시부터 밤 9시 30분까지 문을 연다는 종이 한 장 달랑 붙어있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12시에 문을 연다는 정보를 믿은 우리는 4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한국이었다면, 아니 순례길 걷기 시작한 초기만 해도 이런 상황과 수정 안 된 홈페이지에 짜증이 났을 거다. 

  그런데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들며 자연스럽게 근처 벤치로 가서 앉았다. 7시간 신고 걸은 등산화와 양말까지 벗고, 느긋하게 해바라기 했다. 장 봐온 맥주를 마시고 과자도 먹으면서 쉬다 보니 금방 2시가 되었다. 

  ‘빨리빨리’에 길들고 결과를 중요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조급증과 강박관념으로 평생 살아왔다. 나는 순례길에서 자연스럽게 한 박자 늦추고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배우고 있다.   

   

단순하고 요새 같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프로미스타 성당

         

매거진의 이전글 20. 오늘 만난 웃음 천사 (4월 24일 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