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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2. 2024

20. 오늘 만난 웃음 천사 (4월 24일 월)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오르니요스델 카미노 hornbill is del Camino ~ 카스트로헤리스 Castrojeriz     

  순례길에서 일찍 출발하면서 맛보는 새벽의 고요와 평화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날이 밝아올 때 느낌 또한 특별하다. 작년까지 출근하느라 새벽길을 걸었지만, 수면 부족과 피로에 찌들어 새벽 정취는커녕, 주변 한 번 제대로 쳐다본 적 없었다. 

  어제 머물렀던 알베르게는 문 여닫는 소리조차 건물 전체에 울려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게 신경 쓰였다. 하지만 새벽이 주는 특별한 감동을 포기할 수 없어 최대한 조용히 준비하고 해뜨기 전 출발했다. 

  조용하고 컴컴한 거리를 지나 마을을 벗어나 들판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한껏 즐겼다. 구름이 많아 해 뜨는 모습은 안 보이고 주위는 서서히 밝아졌다. 오전 내내 흐리고, 가도 가도 평원만 펼쳐졌다. 바람도 끊임없이 불었다. 여기가 메세타 고원이다.     


  갑자기 눈앞에 온타나스라는 예쁜 마을이 나타났다. 바람이 센 지역이라 땅보다 낮게 만들어진 마을은 가까이 갈 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쉬지 못했던 우리는 마을에서 바(bar)가 보이자마자 들어가 카페 콘 레체를 주문했다. 

  성당 사진을 찍으려고 가까이 가니 문이 열려있어 들어갔다. 촛불도 켜져 있고 종탑으로 올라가는 문도 열려있어서 성당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온 순례길에 있던 성당 대부분은 오전에 문이 닫혀 있었다. 저녁에 문이 열렸을 때 들어가 보아도 오래된 건물에서 느껴지는 무거움, 장엄함, 음습함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온타나스 성당은 아기자기하고 마치 요즘 성당 같은 느낌이 들어 특별하게 다가왔다.                                                                                          

바람이 센 메세타 고원에서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예쁘게 가꾸어진 마을 온타나스가 나타난다.

  다시 걸었다. 멋스럽고 영적이지만 허물어진 건물을 지나 폐허가 되어가는 마을도 지났다. 거리에 버려진 커다란 개들이 있어서 무서웠다.

  한참을 더 걸어 목적지 카스트로헤리스에 도착했다. 한가운데 산을 중심으로 아래쪽이 마을이다. 산꼭대기에는 허물어져 가는 오래된 건물이 있고, 산 중턱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굴이 많이 뚫려있다. 무너져 가는 건물 잔해가 많아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을에 있는 안내판에 의하면 산꼭대기에 있는 건물은 BC2000년에 지어졌단다.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남편이 힘들다고 해서 산 아래쪽만 돌아보았다.    

  

  순례길에서 찍은 내 사진은 하나 같이 표정이 굳었다. 특별히 웃을 일이 없었다. 걷는 것도 힘들고, 언어도 자유롭지 못하고, 매일 바뀌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급급했다. 무엇보다 내가 순례에 나선 목적이 불분명했다.

  대체로 순례자들 표정은 온화하고 부드러운데, 오늘 유난히 기쁨에 찬 밝은 얼굴로 걷는 젊은 순례자를 만났다. 순례길에서 우리를 스쳐 빠르게 앞서가며 인사를 하는데 천사의 미소가 저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에서 다시 만났을 때 밝은 미소 그 순례자는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활짝 웃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웃음은 내게 큰 힘과 위안이 되었고 경직되고 굳어있던 나를 돌아보게 했다. 좀 더 느긋하고, 자유롭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순례길을 즐겨보라는 사인 같은 밝은 미소 순례자는 오늘 만난 천사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리는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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