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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2. 2024

19. 물벼락으로 시작한 하루 (4월 23일 일)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부르고스 Burgos ~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 Hornillos del Camino      

  어제 어두운 새벽 빗속을 걸으며 비를 홀딱 맞았다. 오늘은 20km 정도만 걸을 계획이라 조금 늦게 일어나 여유 있게 출발하기로 했는데, 팔에 축축한 느낌이 들어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던 물통에서 흘러나온 물이 침대에 흥건했고, 중요한 물건을 넣어 매고 다니던 가방과 핸드폰도 젖었다. 방수된다고 해서 거금을 주고 산 가방 안에 있던 지갑과 돈까지 젖어들었다. 널어놓았던 수건으로 얼른 물을 닦아 수습하고 젖은 옷은 그냥 입은 채 말렸다. 그렇지 않아도 밤새 추웠는데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침낭 속에서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체온을 유지하려 애썼다.      


  비는 안 내리지만, 날씨는 흐렸다. 예정대로 출발했는데 브루고스가 큰 도시라 길이 넓고 순례길 표시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바닥에 그려진 조금 특이한 모양 화살표를 따라 걷다가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 구글 지도를 켜려는 순간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 

  순례길은 그쪽이 아니라고 한다. 스페인 말로 길을 알려주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다 알아듣고 있다. 내가 “다리를 건너야 한다고요?” 분명히 한국말로 확인하는데 그 사람은 내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통은 단지 언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들른 마을에는 벽화가 많았다. 벽에 그려진 노란 화살표 아래 산티아고까지는 476km라는 숫자가 쓰여있다. 아, 벌써 절반 정도 걸었다. 

  들판으로 나오니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원래 바람이 센 지역인지 멀리 풍력 발전기가 줄지어 서 있다. 거센 바람에 코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몸은 휘청거리며 지탱하기 힘들었고, 귀에서는 바람 소리가 윙윙거렸다.

  바람이 잠시 멈추는 짧은 순간에는 새의 지저귐이 들렸다. 벌판 어디에 새가 숨어있는지 모르겠지만 바람 소리와 장단을 맞추는 것 같은 새소리는 환청처럼 느껴졌다.    

 

바람 많은 넓은 들판에 줄지어 서 있는 풍력 발전기

  오늘 묵을 알베르게(Albergue Hornillos Meeting Point) 이층 침대 일 층은 남편 앉은키보다 높았다. 그동안 무릎이 안 좋은 남편이 일 층을 쓰며 침대 쇠 프레임에 수없이 머리를 부딪혔다. 나이도 들어가는데 머리가 더 나빠지진 않았을까 걱정될 정도였는데 머리 부딪칠 일이 없어 좋았다.

  동네가 작아서 식료품점 한 곳 있고, 성당 구경하고 돌아서니 마을 끝이었다. 하늘도 맑아지고 바람도 세서 빨래 걱정은 안 했는데 잠깐 내린 소나기에 빨래가 다 젖었다. 

  알베르게에서 순례자 저녁 식사를 제공한다고 했지만, 식사 시간이 늦어 우리는 장을 봐서 점심 겸 저녁으로 먹었다. 식료품점 물건값은 비쌌지만, 품질은 좋았다. 스페인 저녁 식사 시간은 보통 8시 전후라 그때 저녁을 먹고 자면 소화가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점심 겸 저녁을 먹는다. 오늘, 이렇게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하루가 또 저문다.     

소나기에 젖은 빨래는 바람에 다시 잘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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