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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2. 2024

18. 어둠 속 비를 맞으며 (4월 22일 토)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산 후안 데 오르테가 San Juan de Ortega ~ 부르고스 Burgos      

  어제 우리가 머물렀던 수도원 알베르게 근처에는 슈퍼마켓도 없어 아침 먹거리를 사지 못했고, 걷다가 가장 먼저 나오는 마을 바(bar)에서 사 먹기로 했다. 평상시처럼 6시 전에 일어나 준비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고어텍스 바지를 덧입을까?, 판초만 입을까?, 조금 기다렸다 늦게 출발할까? 우리는 기본 짐만 들고 나머지는 모두 다음 목적지까지 택배로 보내기 때문에 잘 판단해야 했다. 

  잠깐 고민한 후 고어텍스 바람막이 위에 판초 우의를 입고 머리에 헤드랜턴을 쓰고 출발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다.

  마을에 있지 않은 수도원 알베르게를 나오니 밖은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길은 산으로 이어졌다. 판초 길이가 짧아 바지가 젖고, 장갑도 젖어 다리와 손이 시렸다.      


  고어텍스 바지를 입을걸, 조금 있다 출발할걸, 택배 보내는 배낭에 고어텍스 바지가 있는데 비를 맞고 추위에 떨고 있다니 등등 오만가지 생각이 스치며 정체 모를 화가 났다. 첫 번째 마을 아헤스가 보여 반가웠지만, 그곳에는 문을 연 바(bar)나 카페는 보이지 않았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고 마을을 지나 들판으로 나오니 바람도 세게 불었다. 해까지 늦게 떠서 사방이 어두운데 얼굴로 들이치는 비에 안경 렌즈가 젖어 앞이 잘 안 보였다. 배까지 고파서 내 인내심은 한계를 넘어 폭발했다. 

  비를 맞고 걸으며 남편에게 아무 말이나 막 쏟아내며 화풀이를 해댔다. 물론 그래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큰소리로 투덜거리며 빗속을 정신없이 걷다 보니 주위가 차츰 밝아지고 비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때마침 “한 시간 넘게 비 좀 맞았다고 되게 난리네.”라는 남편 말에 머쓱해지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조금 더 걸었다. 비가 그치고 먹구름도 점점 멀어져 가며 파란 하늘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황홀하고 감동적이어서 언제 화났었나 싶게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비를 맞지 않았다면 그렇게 멋진 하늘을 못 보았을 거다.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나온 하늘은 아름답고 황홀했다.

 

    10km 정도 더 걸었다. 마을이 나타났고 영업 중인 카페가 보였다. 어둠 속에서 비를 맞으며 강행군했던 우리의 미련함을 위로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 이것저것 주문했다. 특히 문어 꼬치는 부드럽고 맛있었다. 배부르니 행복감이 밀려오는 내 단순함에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부르고스까지 가는 길은 그동안 걸었던 순례길에 비해 안내표시가 적었다. 갈림길에서 여러 차례 헤맸고 구글 지도를 참고했다. 심지어 순례길을 알리는 화살표가 거꾸로 된 곳도 있었다. 다행히 동네 주민 덕분에, 차가 쌩쌩 달리는 위험한 넓은 찻길을 건너긴 했지만, 순례길로 들어섰다. 

  부르고스를 한 시간 정도 남기고 우리는 바(bar)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며 갈증을 풀었다. 따뜻한 바에 들어가 판초와 젖은 옷을 벗고 편하게 쉬니 살 것 같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순례자 부부를 만났다. 블로그에 올린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를 읽었다며 나를 알아보았다. 조금 민망했지만, 기분 좋았다.  

   

  부르고스는 대도시답게 넓은 도로, 많은 자동차와 사람, 큰 건물들이 즐비했다. 넓은 공원도 여기저기 보였다. 자동차가 사람만 보면 멈췄고 미리 서서 기다려 주기도 해서 미안할 정도였다. 

  드디어 부르고스 대성당에 도착했다. 공식 거리는 25km 정도인데, 빗속을 걷고 헤매기도 해서 평상시보다 시간이 더 걸렸고 다른 날보다 몹시 피곤했다.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Casa de Los cubos Muncipal Pilgrims Hostel)는 지금까지 이용한 알베르게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시설도 좋다. 그러나 배낭 택배를 받아주지 않아 배낭 택배를 이용하는 순례자는 알베르게 앞 카페에서 택배를 보내고 받아야 한다. 

  알베르게 체크인하고 얼른 씻고 편하게 쉬고 싶은데 택배로 보낸 배낭이 도착하지 않았다. 배낭 택배를 이용하는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이 또 슬금슬금 올라왔다. 그런 내가 실망스러웠다.

  밖으로 나가 부르고스 성당을 구경했다. 입장료가 일반인은 11유로 순례자는 5유로다. 부르고스 성당 외관은 화려하고 웅장해서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한참 넋 놓고 바라보았다. 성당 내부에도 볼거리들이 많았지만, 그동안 순례길에서 보았던 성당들과 겹치기도 하고, 피곤해서 휙휙 지나치며 대충 돌아보았다.

  밥도 먹고 배낭도 찾으러 알베르게 앞의 카페로 갔다. 순례자들을 위한 단품 음식과 영어로 된 메뉴판이 있어 편했다. 그래도 지친 우리는 눈에 띄는 대로 아무거나 주문했고 음식이 나왔을 때 돼지고기와 닭고기 크기에 놀랐다. 두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많아 보였다. 맛있어서 먹다 보니 그 많은 양을 다 먹었다. 배가 부르니 몸과 마음이 느긋해지며 피곤이 더 몰려왔다. 배낭을 찾아 얼른 알베르게로 갔다.    

  

  부르고스가 큰 도시라서 며칠 머무는 순례자들이 많다고 하길래 잠시 고민했다. 부르고스 성당은 이미 보았고, 성당을 제외하니 부르고스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부르고스에서는 더 머무르지 않고 내일 바로 이동하기로 했다. 

  내일부터는 들판만 반복되며 볼거리도 없고 지루해서 일정이 빠듯한 순례자는 차를 타고 건너뛰기도 한다는 메세타 평원을 걷게 된다. 어느덧 산티아고 순례길은 중반부로 접어들었다. ‘기대된다’라고 해야 할까? 아니, 잘 모르겠다.            

        

웅장하고 화려해서 감탄을 자아냈던 부르고스 성당의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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