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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2. 2024

17. 점점 투명해지는 나 (4월 21일 금)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벨로라도 Belorado ~ 산 후안 데 아르테가 San Juan de Ortega      

  순례길 하루는 같은 패턴으로 반복된다. 6시 전에 아침을 간단히 먹고 6시 조금 지나 출발하여 25km 내외로 걸어 다음 목적지까지 간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숙소 체크인하고, 샤워, 빨래(남편이 담당)하고, 장 봐서 밥을 만들어 먹거나 식당에서 사 먹고, 쉬다가 성당과 마을을 구경한 후 돌아와 짐 정리하고,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단순한 생활에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이 사라진다.      


  아침 일찍부터 햇살이 뜨거웠지만 바람이 불어 덥지 않았고 아직 감기가 낫지 않아 바람에 자꾸 움츠러들었다. 나는 가진 옷을 다 껴입고 걷는데 젊은 순례자들은 반 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내 옆으로 휙휙 지나 앞서나간다.

  남편은 기분이 좋은지 노래를 흥얼거린다. 음치라며 평상시 절대 노래하지 않던 사람인데 마음이 편하고 자유로움이 느껴지는가 보다.

  오르막에서는 등산화가 발목 뒷부분을 눌러 특히 아픈데 오늘 산을 넘어야 해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다행히 산은 완만했고, 우리나라 산처럼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거나 바위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산 규모가 커서 한참을 오르고 내려야 했다. 

  산꼭대기에는 스페인 내전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어느 나라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저절로 굴러가지 않는다.     


  산을 다 내려오니 우리가 묵을 수도원 알베르게(Monastery San Juan de Ortega Pilgrims Hostel)가 보였다. 한때 이 수도원에서 살았을 수도자들의 절제된 생활을 상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2층 침대의 1층이 너무 낮아 1층을 사용하는 남편은 머리를 수없이 침대에 부딪쳐 걱정스러울 정도다.

  수도원 바로 옆에 있는 바(bar)는 브레이크타임 없이 순례자를 위해 영업했다. 우리는 시원한 맥주와 검은 쌀로 만든 순대, 돼지고기, 샐러드로 점심을 먹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맛있다.     

                                                             

순례자를 위한 순대, 돼지고기, 샐러드 한 접시는 맛있는 식사였다.

  점심 식사 후 성당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마을도 아니고 알베르게로 이용되고 있는 수도원과 부속 건물 몇 개만 있는 슈퍼마켓조차 없는 지역이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거세지며 비까지 내렸다. 날씨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후드를 안 빨았을 텐데, 내일 입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 

  순례길 생활은 단순하고 원초적으로 된다. 나는 그냥 ‘특별한 것 없는 인간’이라는 자각과 함께 머릿속은 텅 비어 가고 점점 투명해지는 느낌이 든다.     

     

두꺼운 벽 안쪽 수도원에서 절제된 생활을 했을 수도자들의 체취가 느껴졌던 오래되고 낡은 수도원 알베르게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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