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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2. 2024

34. 오래된 부부의 내공 (5월 8일 월)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라 라구나 데 카스티야 La Laguna de Castilla ~ 트리아카스텔라 Triacastela      

  우리 리듬대로 새벽에 출발했고, 해가 뜨기 전 산 정상에 있는 오 세브레이로에 도착했다. 산 정상에서 붉은 여명이 아름다운 하늘에 놀랐고, 마을 전체가 돌 건물로 이루어진 모습에 또 놀랐다. 영화 속 장면처럼 비현실적이고 신비롭다. 

  사전 지식이 없어 검색하니 이곳은 로마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마을로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특히 돌과 짚으로 만든 움집이 눈길을 끌었는데 고대 켈트족이 살았던 원시 형태의 집이란다. 역사를 품은 유물이다.     

오 세브레이로에 남아있는 고대 켈트족이 살았다고 하는 특이한 움집은 시간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다.

  오 세브레이로 교구 신부였던 돈 엘리아스 발리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부활시키는 데 평생을 바쳤고, 순례길에서 따라 걸었던 노란색 화살표를 처음으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신부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은 없었을 거라고 한다. 


  우리나라 성당 순례 단체팀(우리에게 불똥 떨어졌던 트렁크의 주인들)을 만났다. 서로 반갑게 인사했다. 어제 이곳에서 머물며 저녁 미사에 참석해 감동의 시간을 보냈고 신부님께 작은 선물도 받았단다. 단체로 하는 순례의 장점 같다. 우리는 마음대로 자유롭게 다니는 장점은 있지만, 순례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여러 사람이 함께하며 확장되는 감동을 맛보기 어렵다.     


  우리나라 산 크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큰 산을 오르내리며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땅 크기를 실감했다. 

  아스팔트로 된 산길이나 땡볕 아래에서 걷는 것도 힘들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가축 똥 냄새다. 특히 산과 산 사이 마을을 걸을 때 축사에서 나는 냄새와 길바닥에 마구 흩어져 있는 가축 똥은 적응이 안 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 시골에 가면 나던 냄새가 떠올라 정겹기도(?) 하다. 

  몇백 년 되어 보이는 나무와 돌로 된 집들이 있는 오래된 마을도 통과했다. 초기 형태의 성당이라는 특이하고 음산한 건물도 보았다. 성당 틈으로 살짝 엿본 성모상은 섬뜩한 모습이라 놀랐다.      


  오늘 우리는 잠깐 다투며 예민했다. 앞에서 걷는 순례자보다 우리 걸음 속도가 빨라 옆으로 비켜 앞서나가려다 뒤에서 우리보다 더 빨리 걸어오는 순례자의 진로를 본의 아니게 방해했다. 그 상황을 미처 파악 못 한 남편에게 알려주려 몇 마디 했더니 갑자기 남편은 “내가 그렇게 몰상식한 놈인 줄 알아?”라며 불같이 화를 내며 욕까지 했다. 나는 어이가 없고 기분도 상해 잠시 떨어져 따로 걸었다. 

  내 말을 오해했거나 딱딱한 말투가 거슬렸던 것 같다. 새벽에 출발 준비하며 소리 안 나게 하라고 여러 번 말했던 게 남편에게는 스트레스였나 보다. 

  걷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치유하는 효과가 확실히 있는지 한참 걷다 보니 별일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남편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남편이 다가와 “무조건 네가 옳아”라며 화해의 제스처를 했다. 나도 부드럽게 말하지 않은 잘못이 있지만 “당연하지.”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걸었다. 이런 게 바로 30년 넘게 살아온 부부의 내공일 거다. 마음이 다시 평온해졌다.      


  사실 순례길에서 내가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건 남편의 수고 덕분이다. 숙소 예약부터 빨래까지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을 다 한다. 덕분에 나는 순례길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책임감과 의무감에서 벗어나, 걷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필요 없는 요즘 나는 긴장을 풀고 느긋하고 편하게 지내고 있다. 

  이제는 하루 25km 정도 걷기는 적당한 운동처럼 느껴지고, 걷기만 하면 하루가 끝이니 이게 바로 신선놀음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은퇴 기념 첫 번째 프로젝트인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도 행복하게 걸었고 하루를 잘 마쳤다. 남편이 고맙다.     

남편과 스물네 시간 함께 하며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도 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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