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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2. 2024

35 판초 비옷으로 어림없는 폭우 (5월 9일 화)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트리아카스텔라 Triacastela ~ 사리아 Sarria     

  오늘 사리아까지 왔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남은 거리가 100km라는 이야기다. 순례길 증명서를 받을 수 있는 최소 거리가 100km다.

  종일 비가 예보되어 있다. 우리가 머물렀던 알베르게 건물은 낡았지만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호하지 않는 듯) 화장실과 침실이 분리되어 있고, 주방도 따로 있어, 새벽에 여유 있게 아침을 먹고 편하게 출발했다.      

  비는 생각보다 많이 내렸다. 지난번 비 올 때 고어텍스 바람막이를 입고 더웠던 기억 때문에 판초 비옷을 선택하고 고어텍스 바람막이는 택배로 보냈다. 비를 맞으며 걷다 보니 판초 안으로 비가 새는 것 같았다. 남편은 새는 게 아니라 결로 현상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경험 없는 지식의 한계를 느꼈다. 나는 소위 과학을 가르치던 사람이었다. 

  고어텍스를 입을 때 결로 현상은 없었다, 가벼운 티에 고어텍스만 입었다면 가장 쾌적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다. 그나마 남편과 나 모두 고어텍스 바지는 입고 있어 다리는 젖지 않았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산을 오르내리느라 힘들고 땀이 쏟아졌다. 판초 안은 결로 때문에 흐르는 물과 몸에서 나는 땀으로 뒤범벅되었다. 판초 모자 안에 챙모자까지 썼지만, 비는 얼굴로 들이치며 흘러내려 앞도 잘 안 보이고 고생스러웠다. 어제 순례길 걷는 것이 적당한 운동이니, 적성에 맞느니 하는 쓸데없는 (헛) 소리를 했다. 

  산길 바닥은 가축 똥과 빗물이 합쳐져 흐르고, 사방에서 가축 똥 냄새가 진동했다. 지난주 내내 똥 냄새를 견디며 걸었는데 빗속에서 맡는 냄새는 유난히 더 심했다.                                                                                    

판초 비옷을 입은 남편

  두 시간 이상을 걷도록 바(bar)나 카페는 없고 비가 내리니 아무 데서나 쉴 수도 없었다. 한참 만에 나타난 바(bar)는 구세주처럼 보였다. 

  아스팔트와 흙길을 반복하며 산을 오르내리다 보니 비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비가 그치니 풀은 상큼하고 밝은 초록색으로 빛났다. 눈앞에 펼쳐진 하얀 물안개와 어우러진 초록빛 예쁜 풍경은 빗길을 걷느라 지친 우리에게 힘을 주었다. 

  구름이 산을 타고 오르며 약한 비가 계속 오락가락하더니 서서히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힘든 날이다.  

   

  비와 땀에 젖은 우리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인데, 사리아가 가까워지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해가 났다. 여느 마을처럼 강이 나타났고, 다리를 건넜다. 사리아 외곽에는 아파트가 많았다. 

  산티아고까지 100km 남은 것을 기념하며 편하게 쉬려고 펜션(Pension Escalinata)을 예약했다. 당연히 주방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냥 화장실 딸린 방이었다. 주방은커녕 세탁실도 없었다. 

  비가 내리는 바람에 쉬지도 못하고 계속 걸어서 일찍 도착했지만, 택배 보냈던 배낭은 우리보다 늦게 도착했다. 배낭 도착 후 빨래방 찾아 빨래한 후 찾아간 모든 식당과 바(bar)는 브레이크타임이라 음식을 안 판다. 대부분 가게도 철문을 내리고 영업을 안 한다. 사리아는 브레이크타임을 철저히 지키는 듯했다. 

  그동안 거쳐온 곳은 브레이크타임에도 영업하는 식당이나 바(bar)를 찾을 수 있었고, 요구하면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는데 사리아에서는 어림없다.      


  식당은 포기하고 대형 슈퍼마켓을 찾아가는 중 영업 중인 제과점이 보였다. 배고파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들어가 눈에 보이는 대로 주문했다. 먹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오렌지 주스, 추로스, 빵 2가지, 초콜릿, 포도주까지 마셨는데 10유로도 안 나왔다. 환율만 지금처럼 높지 않다면 스페인 기본 먹거리는 정말 싸다.     

빵 두 개, 초콜릿, 오렌지 주스, 추로스, 포도주까지 모두 합쳐 10유로도 안 나왔지만 배부르고 맛있게 잘 먹었다.

   지금까지 700km를 걸었고 집 떠난 지 한 달이 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순례길 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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