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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백 Feb 02. 2024

37. 소통은 언어로 하는 게 아니야(5월 11일 목)

40일간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일기 

포르토마린 Portomarin ~ 파라스 데 레이 Palas de Rei     

  어제 알베르게에서 벌레한테 물렸다. 저녁 9시가 다 돼가는 시간이었지만, 구글 검색을 하니 약국이 영업 중이라 바로 달려갔다. 약사는 무슨 벌레인지 모르겠지만 위험하지는 않고 약을 바르면 가라앉는단다. 또 뭐라고 열심히 설명했는데 내 짧은 영어 실력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약을 발랐더니 차츰 가라앉았다.

  벌레 물린 사실을 알베르게 주인에게 알렸다. 집으로 돌아갔던 주인은 알베르게로 왔다. 자신은 전혀 벌레를 본 적이 없고, 사리아 (전날 머물렀던 곳)에서 물려왔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난감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나도 벌레를 못 보았고, 여기서 물렸는지 확실하지도 않지만, 이 침대에서는 자고 싶지 않고 방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2인실이 다 찼다던 주인은 3인실이 비었으니 가서 자되 짐은 다 두고 가라고 했다. 배낭에 붙어서 벌레가 방이나 침대로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주인아주머니는 스페인어밖에 못하고 우리는 스페인어를 전혀 못 하고 번역기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지만 소통할 수 있었다. 어쨌든 주인이 내 요구에 바로 오케이 하니 고마웠다.

  소통이란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서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고, 어제처럼 언어가 달라도 서로 이해할 수 있다. 순례길에서 그 사실을 여러 번 체험했다.  

   

  5월 중순이지만 아침 기온이 5도까지 떨어져 다시 패딩을 입었다. 일교차도 크다. 출발 후 꽤 시간이 흐르도록 사방은 안개로 꽉 차 있어 바로 앞도 보이지 않았다. 

  높이 700m 커다란 산을 오르내렸다. 완만한 오르막이 산 정상으로 이어졌다. 숲길을 한참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확 트인 들판이 나타나고 또 숲길이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생각 없이 걸었다. 아니, 걸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순간순간 감각에 충실해져 좋은 풍광 보면 감탄하고, 힘들면 쉬고, 더우면 옷 벗고, 추우면 옷 입고,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간식을 먹고 걸었다. 그리고 숙소에서 하루를 정리하며 글 쓰고 쉬는 그 자체로 행복하고 평화롭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생각은 사라지고 마음은 평화를 얻는다.


  순례길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고 남은 거리가 줄어들수록 머릿속이 텅 비어 간다. 남편에게 물으니 나와 함께 걷는다는 사실이 그저 좋을 뿐이라고 한다. 하긴 남편은 원래 감성, 철학, 느낌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살면서 남편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배려를 받을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순례길에서 배려와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덕분에 말도 못 하고, 준비도 부족했고, 스페인 음식 이름조차 모르는데 한 달 이상을 걷고 있다. 나중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생각하면 여러 사람의 친절과 배려가 떠오를 것 같다. 

      오늘 우리가 머무는 알베르게(Duteiro Hostel)에 우리나라 순례자가 많아 한국인 단체처럼 보인다. 주방이 있어, 장을 봐서 샐러드를 만들고, 빵과 치즈, 하몽, 포도주로 점심 겸 저녁 식사를 했다. 순례길 하루가 또 지나간다.      

대성당은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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