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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Apr 24. 2024

가마솥 목욕탕

까마귀가 까꿍!

지난해, 아파트 분수대가 막 축포를 쏘아 올리기 시작할 때쯤 

입주 이후 처음으로 주말 장터가 열렸다.

토요일 아침 느긋한 10시, 

형형색색의 시끌벅적한 장터 소리가 몇 년째 코로나로 방콕하고 있던 이들을 집밖으로 불러 모았다.

'미경아, 놀자' '언니야, 놀자' '미경아, 빨리 나와'

나갈 때까지 자꾸 불려재끼는 대문 밖 장난스러운 부름에  

더 이상 꾸물됐다간 야단 나겠다 싶어

늦잠 자는 아이들 조용히 내버려 두고 지갑을 챙겨 들고 튀어나갔다.


이게 얼마만이더냐?

오랜만에 울려 퍼지는 싱그러운 자유의 함성,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숨통 트인 활기찬 목소리가 장터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복작복작 부적부적 오가는 손길마다 어른 아이들 모두 함박웃음을 지었다. 

심지어 주인을 따라나 온 강아지까지 덩달아 생글방글하였다.


호기심을 장전하고 이곳저곳을 탐색하다 인파가 가득 몰려 있는 트럭 앞에 발길을 멈추었다.

'도대체 뭐가 있길래 댕기머리를 저리도 길게 늘어뜨렸나?'

긴 행렬에 마음이 조급하여 무조건 끼고 보는 군중심리가 발동되었다.

줄꼬랑지를 잡고 서서 목을 쭉 빼고 뭐야 뭐야 그제야 살펴보았더니, 

가마솥에서 순대가 하얀 김을 살포시 내뿜고 있는 게 아닌가.

따끈따끈한 순대 한 접시 사 와서 맛을 보고는, 

그다음 주, 장이 서자 마자 냅다 달려 나가 일빠따로 트럭을 찜했다.


사장님, 

순대가 맛있게 익으려면,

아직 뜸을 좀 더 들여야 한다기에 먼산을 쳐다보며 멀뚱멀뚱 서있기가 뭣해서

"무쇠 가마솥 오랜만에 봅니다" 말문을 여니

사장님, 백만 원이 훌쩍 넘는다는 가마솥 자랑을 시작으로 소죽 끓이던 얘기를 꺼내셨다.

'내가 소싯적에 소죽 좀 끓여 봤지'

하여 친숙한 옛날 예적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주고받다

나이까지 눈언저리로 교환하고 얼떨결에 언니 동생 자매결연을 맺었다.

숯불에 김 굽던 얘기며, 누룽지 얘기며, 군고구마 얘기며, 

그 시대를 공유한 사람만이 아는 향수를 자극하는 이야기에 

신이 관광버스를 타고 달리며 막춤을 추었다.


사장님이 

"혹시 소죽 끓이던 가마솥에 물을 데워 목욕해 봤어요?" 하였다.

'가마솥 목욕탕?'

"그럼요!, 그럼요!"

그 짝 동네 이 짝 동네 비슷비슷 닮은 모습에 얼굴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까마귀 지나가다 까꿍' 하며 친구 하자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여름에는 강으로 나가 매일같이 멱을 감으니 피부에 박힌 자질구레한 때가 절로 씻겨 나갔다.

문제는 겨울이었다.

목욕탕 가려면 읍내에 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버스도 잘 다니지 않지, 

집안 살림 곤궁하니 

대중목욕탕에 가는 것은 엄두를 못 내었다.


숨바꼭질, 고무줄놀이, 찰개(공기놀이), 오자미차기, 사방치기, 오징어 놀이, 

구슬치기,  딱지치기, 비사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해 가는 줄 모르고 흙바닥에서 뒹굴뒹굴 뒹굴며 흙먼지를 뿌옇게 일어키며 놀다 

밥 먹으러 오라는 소리에 손을 대강 툴툴 털고는 

그 옷 그대로 밥을 먹고

그 옷 그대로 잠자리에 들고

그 옷 그대로 밥을 먹고

그 옷 그대로 학교에 갔으니

겨울이 시작되면 꼬질꼬질 때가 한 겹 두 겹 세 겹 첩첩이 쌓였다.


'깜다 깜다 해도 너무 깜다!' 

까마귀 콧웃음을 치며 지나가던 날,

소죽 솥을 깨끗이 닦아내고 물을 끓여 가마솥 목욕탕 문을 열었다.

지글지글 가마솥에 몸을 담그고 앉아 첩첩산중 묵은 때를 벗겨내며 깔깔거렸다.


빡빡 밀어라

세게 밀어라

아 야야야, 아 히히히

따꼼 따꼼, 울긋불긋


어메! 이게 뭐꼬? 

줄줄이 사탕처럼 꿰어져 나온다

한번 더 밀어라

까만 줄 하얀 줄 지우개처럼 밀린다 


웃음소리 대문 밖 골목길로 담장을 넘었다.

옆집 아지매 지나가다 들어와서는

"아따!, 인물이 훤하네!" 하셨다.


까막까막 까마귀도 비켜가는 새까만 때구정물 씻어내고 거울 앞에 섰다.

뽀얀 내 얼굴, 

하얀 내 마음,

명경처럼 맑게 빛났다.



어느새 

사장님,

김 모락모락 찰지게 익은 가마솥 순대 

나박나박 썰어서 첫 개시라며 듬뿍 담아 주셨다.


검정 비닐봉지에 순대 담아 달랑달랑 들고서

'얘들아, 라떼는 말이야!'

얘기해 주고픈 마음에 입이 근질근질하여 빨랑빨랑 걸었다.


"얘들아, 나와 봐"

"엄마 가마솥 순대 사 왔어"

식탁에 둘러앉아

"음~, 음~, 음~ 라떼는 말이야, 가마솥에서~ "

부릉부릉 입시동을 걸었다.



물 쩔쩔 끓나 푸르르푸우

누가 먼저 할래 가위바위보

춥다 얼른 들어 온나 엇뜨거 앗따가


타닥타닥 둥구리 불을 지퍼라

지글지글 가마솥 물을 데워라 

참방참방 꼬마야 설맞이 하여라    -가마솥 목욕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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