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바로 세우는 디자인

컴퍼니 브랜딩 프로젝트

by 이드 쉐이퍼

'왜 자꾸 BI를 회사 공식 문서에 사용할까?'

디자인팀이었을 때부터 저를 괴롭히던 의문이었습니다. 회사 CI가 분명히 따로 존재하는데, 공문서, 심지어 공장 사인물까지 브랜드 로고가 쓰이고 있었거든요. CI를 만들고 배포까지 했던 제 입장에선 어색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도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차피 회사 = 브랜드 아닌가요?” 같은 반응이 더 많았죠.

하지만 조직은 점점 더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OEM 사업 비중이 커지면서 브랜드 하나만으로 회사를 설명하기엔 한계가 드러났고, 회사와 브랜드의 경계를 바르게 세워야만 하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그래픽 개발에 늘 관심 있던 디자이너 팀원들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해보기로 했습니다.


고민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해결을 위해서는 단지 매뉴얼이나 디자인 몇 개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먼저 ‘우리가 어떤 회사인지’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그 정리가 있어야, 회사의 시각도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 조직의 브랜드 아키텍처를 새롭게 정의하는 일부터 시작했다.’파장‘, ’영향력‘, 그리고 ‘깔끔함’ 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아키텍쳐를 조정하며 비쥬얼도 함께 서치하기 시작했다. 자사 브랜드의 그것과 다른 톤의 무드보드를 만들어가며 브랜드와 회사를 구분하는 기준을 세웠다.


본격적인 시각화는 CI를 만든 서체에서 시작했다. 폰트의 곡선과 대각선을 확대해, 반복과 배치를 통해 속도감 있고 전진하는 그래픽을 만들었다. 유연하고 에너제틱한 BI와는 다른 인상, 진취적이면서도 정돈된 톤의 시각 언어를 만들어 회사라는 조직이 가진 추진력과 스케일을 표현하고 싶었다.


필요했던 것부터

그래픽 모티프를 기반으로 어플리케이션을 하나씩 정비해 갔다. 명함 디자인을 CI 기반으로 재구성했고, 층별 안내도, 자리 명패, 화장실 사인 등 일상의 시각 접점을 정리했다.


가장 반응이 좋았던 결과물은 의외의 아이템이었다. 영업용 보냉백. 실제로는 다들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막상 요청하기엔 애매했던 물건이었던 것이다. 회사 그래픽을 입힌 보냉백을 제작해 배포하자, “진작 있었어야 할 아이템”, “미팅에서 반응이 아주 좋아요. 협력 업체가 선물처럼 받아들여요” 같은 피드백이 쏟아졌다.


전시 부스에도 변화를 주었다. 모든 부스 행사에서 B2B 부스에서 브랜드 슬로건 등 BI 위주의 디자인을 전개했던 것에서 회사 전체의 사업 구조를 보여줘야 하는 B2B 부스에서는 CI 기반으로 디자인 방향성을 조정하였다. 같은 디자인 시스템 안에서 서로 다른 톤을 조정하는 일이 새로운 훈련이 되었고, ‘디자인이 계층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작동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 시점이었다.

(좌) 디자인 조정 전 B2B 부스 전경 / (우) CI 기반으로 디자인 조정한 후의 B2B 부스 전경



문제 해결로 접근하는 브랜딩

다들 어딘가 이상하다고는 느끼고 있었지만 말로 꺼내기 애매하고, 누군가가 잡아주길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럴 땐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필요하다. 조직에서 그런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막연한 불편함이 ‘프로젝트’로, ‘성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프로젝트는, 회사 안에 떠다니던 수많은 ‘말 없는 시선’들을 디자인이라는 언어로 정리해보고자 한 시도였다.

컴퍼니 브랜딩은 그럴싸한 디자인이 전부가 아니라, 문제해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구성원들이 겪는 불편을 먼저 들여다보고, 그걸 정리해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 디자인이 조직 안에 스며들 수 있었다.


함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이 조직에 스며드는 과정에서 분명한 변화를 보였다. 알아서 구분해서 사용하는 구성원들을 보며 이 프로젝트가 필요한 일이었구나, 하고 한번 더 실감하게 됐다. 그리고 그만큼, 조직이 스스로를 설명하는 방법도 단단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