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S(Brand Identity System) 만들기
"우리 브랜드가 이런 이미지였나요?"
"이 제품은 우리 브랜드와 맞는 건가요?"
브랜드팀이 구성되기 전부터 이미 내부에서는 이런 질문들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브랜드 정체성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신제품 기획이나 콘텐츠 제작 시마다 수많은 논의가 반복되었었죠. 마케팅팀이 생각하는 '브랜드다운 제품'의 기준과 개발팀이 실제로 만들어 온 제품 사이에는 늘 괴리가 있었고요.
분명히 우리는 1년 전에 브랜드 리뉴얼을 완료했었어요. 10개월이나 걸려서 새로운 브랜드 컨셉을 만들고, 디자인 시스템까지 일관성 있게 적용했습니다. '즐거움'이라는 브랜드 에센스를 핵심으로 잡아서 기존 샐러드 브랜드들의 뻔한 클린&심플 이미지에서 벗어나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느낌으로 바꿨고요. 당시만 해도 꽤 만족스러웠는데, 실무에서는 여전히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제품을 만들 것인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아무도 명확하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어긋나 있었던 거죠.
돌이켜보니 첫 번째 작업은 진정한 의미의 리뉴얼이 아니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의 핵심은 결국 그 브랜드가 만들어내는 '제품'에 스며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포장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 고문이 우리 회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받은 첫 번째 질문이 이것이었다.
"브랜드 정체성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해 주세요."
고문은 현재 우리의 브랜드 정의 방식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타겟 페르소나와 브랜드 퍼스널리티 만으로 브랜드가 정의되는 건 아니죠. 조직 구성원 모두가 정확히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지금 만든 타겟 페르소나를 보고 개발팀이 '아, 이런 사람들을 위한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구나' 하고 바로 알 수 있을까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페르소나 설정만으로는 브랜드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확립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어떤 정의던, 설명 없이는 와닿지 않는다면 제대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얘기였다.
문제는 우리가 두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는 점이었다. 타겟 페르소나 기준으로 제품 포트폴리오 리뉴얼이 진행 중이었고, 브랜드 퍼스널리티를 바탕으로 한 디자인 시스템 리뉴얼도 동시에 돌아가고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브랜드 에센스와 비전이 먼저 정해진 후 나머지가 파생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정반대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BIS를 만드는 프로젝트와 이미 진행 중인 두 프로젝트와 하나로 연결되어야만 했다.
나는 갑자기 세 개의 퍼즐을 동시에 맞춰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것도 이미 절반쯤 진행된 퍼즐들을.
팀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디자인 시스템까지 포함한 대대적인 리뉴얼을 마무리한 지 겨우 1년. 이번에는 BIS부터 새로 만든다는 건 이미 진행 중인 비주얼 아이덴티티도 바뀔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무한 리뉴얼의 굴레에 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결국 기존의 애매모호했던 브랜드 에센스를 명확하게 다시 정의하는 것이 맞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렇게 보다 체계적인 BIS(Brand Identity System) 수립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체계적인 브랜드 분석에 착수했다. 세 가지 영역에서 조사를 진행했다.
대표진 인터뷰에서 원래 의도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건강한 식사를 즐기는 것이 당연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는 대표님늬 말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중요한 지점을 발견했다. 단순히 '건강한 제품을 파는 회사'가 아니라, '모두에게 건강한 식사가 특별한 일이 아닌 일상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장 과정에서 이 의도가 "맛있는 건강식" 정도로 단순화되어 브랜드의 본질이 희석되어 있었다.
브랜드 자산 분석에서는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수많은 토핑 개수와 다양한 드레싱 옵션, 경쟁사 대비 압도적으로 많은 메뉴 수. 우리의 핵심 자산은 '다양함'이었다. 이는 대표님의 의도와도 완벽하게 연결되었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어야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건강한 식사를 부담 없이, 당연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지점을 BIS에 전면에 드러내기로 했다.
브랜드 인지도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인스타그램에서 300명 규모의 고객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브랜드 최초 상기도에서 2위였지만, 1위와의 차이가 무려 5배에 달했다. 또한 설문에 참여한 소비자들 중 우리 제품을 구매한 고객들조차 브랜드에 대한 인식이 모호했고, 일부는 제품명을 브랜드명으로 혼동하기도 했다.
고객들은 우리 제품을 '맛'과 '영양' 때문에 구매하지만, 브랜드에 대한 감정적 연결은 약했다. 재구매율은 높아도 하나의 제품에만 충성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정확하게 어떤 채널에 입점되어 있는지를 물어보거나, 이미 있는 제품을 신규 런칭 해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기초적인 정보마저 고객들에게까지 닿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브랜드 이미지 조사에서는 다행히도(?) 상위 항목으로 ’ 젊고 트렌디한 ‘, ’친근하고 편안한 ‘ 이미지라는 답변이 나왔다. 다만, 브랜드 퍼스널리티로 잡았던 전문성 확보에 해당하는 ‘신뢰감 있고 전문적인 ‘이라는 항목이 순위권 밖에 있어, 진행 중인 디자인 리뉴얼에 해당 무드를 잘 녹여내야겠다는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해당 조사를 통해 우리 브랜드를 처음 접했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경우 ’아기자기한 ‘을 첫인상으로 꼽은 수가 높았는데, 이 또한 디자인 리뉴얼 프로젝트에서 반드시 개선해야 했다.
경쟁사 분석에서는 각자의 명확한 포지셔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A사는 '신선함', B사는 '간편함', C사는 '프리미엄 건강식'을 중심으로 포지셔닝하고 있었다. '건강', '균형' 같은 키워드는 이미 여러 경쟁사에 의해 선점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압도적 다양함'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이것이 우리만의 차별화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압도적 다양함을 통한 질릴 틈 없는 건강식'이 우리의 핵심 가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 개의 퍼즐을 하나로 맞추려면 먼저 전체 그림을 알아야 했다. 문제는 나 역시 BIS가 정확히 무엇인지, 각 구성요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첫 번째 리뉴얼 때는 기존 가이드라인을 참고해서 비슷하게 만들었을 뿐, 왜 그런 구조여야 하는지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다양한 BIS 구조를 리서치하고, 각 항목의 정의와 도출 방법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브랜드 미션 : "만약 우리 브랜드가 없어진다면 세상은 무엇을 잃는가?"
브랜드 에센스 : 기존 자산을 재해석해 차별화된 '브랜드다움' 정의하기
핵심 가치 : 대표성, 차별화, 소비자 공감이라는 3가지 기준으로 선별
기능적/감정적 혜택 : 실질적 효용과 감정적 경험 구분하여 정의
슬로건 :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메시지 화한 문장
각 항목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건, BIS는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의사결정의 나침반이라는 점이었다. 기존 버전과 비교하며 어떤 항목을 추가하고 삭제할지 결정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무조건 항목을 많이 채우는 쪽으로 빠지지 않도록, 이미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필요했던 기준이 되는 항목을 포함하면서 앞으로의 실무에 기준이 될 수 있는 항목들로 BIS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본 프로젝트의 가장 큰 목표는 '중의적 해석의 여지가 있는 표현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리뉴얼에서 핵심으로 잡았던 '즐거움'이라는 브랜드 에센스만 해도 그랬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즐거움을 말하는 거죠?"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나왔다. 감정이나 느낌을 담은 형용사로는 실무진들이 공통된 기준을 세우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브랜드 에센스는 너무 추상적이면 실행할 수 없고, 너무 구체적이면 확장성이 떨어진다. 그 균형점을 찾아야 했다.
우리가 왜 '즐거움'을 브랜드 에센스로 선택했는지 원점부터 다시 생각해 봤다. 샐러드에 대한 고정관념 – 맛없다, 양이 부족하다, 다이어트할 때만 어쩔 수 없이 먹는 음식이다 – 을 깨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만 억지로 먹는 지루한 선택이 아니라, 맛있고 몸에도 좋으니까 평소에도 자연스럽게 찾는 음식으로 포지셔닝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샐러드를 대하는 감정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봤다.
이런 사고의 흐름은 유지하되, 애매한 감정 표현 대신 우리의 '의도' 자체를 브랜드 에센스로 만들었다. 샐러드 고정관념을 타파하겠다는 명확한 의도 말이다. 그렇게 'Reframe'이라는 단어를 도출했다.
이 에센스를 뒷받침할 핵심 가치로 '압도적 다양함을 통한 질릴 틈 없는 건강식'을 설정했다. 분석 과정에서 확인한 우리의 실제 자산이 경쟁사 대비 차별화된 가치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브랜드 에센스가 결정되고 나니 신기하게도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전 ‘즐거움’ 보다 한결 명확하다는 내부 반응과 함께, 각기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던 팀원들이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고생할 거라 예상했던 슬로건 작업도 의외로 순조로웠다. 기존의 너무 은유적이고 추상적인 표현 대신,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직관적이고 명료한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최종 결과물은 'Eat fresh, be your Best'였다.
가장 먼저 변화가 시작된 곳은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이었다. 기존 SNS 콘텐츠가 제품 중심이었다면, 새로운 접근은 '건강한 습관'이라는 브랜드 메시지를 중심으로 콘텐츠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이런 변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새로운 접근 방식의 콘텐츠는 기존보다 높은 인게이지먼트를 기록했고, 고객들의 댓글도 더 깊이 있는 공감을 보여주었다.
이 BIS 프로젝트는 디자이너에서 브랜드 매니저로 전환한 후 주어진 가장 규모 있는 과제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첫째, 브랜드는 '약속'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정한 브랜드 에센스와 비전은 단순한 문구가 아니라, 고객과의 약속이자 조직의 나침반이다.
둘째, 브랜드 정체성은 '무엇을 하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브랜드의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 때로는 매력적인 기회라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셋째, 브랜드 매니저의 역할은 모든 답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다양한 관점을 조율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넷째, 모든 브랜드 요소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라도 어긋나면 브랜드 전체가 흔들린다. 우리는 모든 요소가 서로 일관성을 유지하는지 계속 점검했다.
처음에는 '내가 이 프로젝트를 과연 이끌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있었다. 하지만 점차 깨달은 것은, 디자이너로서의 경험과 시각적 사고능력, 그리고 사용자 중심의 접근법이 이 역할을 수행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역순으로 진행되는 중이었던 세 개의 프로젝트를 중간 지점에서 만나게 하는 과정은,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컨셉을 유지하며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완료해야만 했던 수많은 경험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첫 번째 리뉴얼은 '그럴듯한 브랜드 룩앤필'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번에는 '실제로 작동하는 브랜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 차이를 이해하는 데만 1년이 넘게 걸렸지만, 이제는 분명하다.
진짜 브랜딩은 예쁜 로고나 멋진 슬로건에서 완성되는 게 아니다. 조직 구성원 모두가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고 움직일 때, 그때 비로소 브랜드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BIS 문서는 이제 완성되었다. 타운홀 미팅에서 전사 임직원에게 공유했고, 전사 노션 홈에 가이드로 업로드도 완료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이제부터라는 걸 안다. 만들어진 브랜드 가이드라인을 조직 구성원 모두가 정확히 이해하고, 실제 업무에서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 말이다. 이건 정해진 기한이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앞으로 계속 신경 써야 할 기본 업무가 될 것이다.
'Reframe'이라는 새로운 브랜드 에센스가 단순히 가이드라인 속 키워드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내리는 제품 결정과 마케팅 방향에서 실질적인 기준으로 작동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브랜딩이 왜 필요한지 팀 모두가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