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단상

J에게

by Spero

“지금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1997년 4월 5일, S가 우리 곁을 떠났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 친구를 애도했던 J가 26년이 지나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의 부재를...


진실을 말할 때마다 더듬거리던 그의 말투, 자지러지게 웃어젖히던 그의 웃음, 노래방 가자며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눈감은 채 부르던 ‘옛사랑’...

사당역에서 10분간 쉬었다 계단을 올라왔다고 말하던 지난봄만 해도 친구의 병이 그렇게 깊은 줄 몰랐습니다. 약속에 나가지 못해 미안하다며, 입원해 수술받고 나오기만 하면 다 괜찮아질 거란 그의 말을 믿은 게 잘못이었습니다. 쎈척하고 살아온 친구였기에 아마도 그의 라틴 아메리카 20년은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무척이나 고단한 일상이었을 겁니다. 수 년 전 후배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J와의 조우를 자랑할 때만 해도 퇴직하면 제일 먼저 아르헨티나 갈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싼 비행기표 사지 않아도 된다며 예의 그 허당끼를 발동하면서 호기롭게 영구귀국 소식을 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친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게 잘못이었습니다. 귀국의 진짜 이유가 심장을 뛰게 하려던 것이었는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을 친구의 시간이 너무도 길고 그 공간 또한 헤아릴 수 없을만치 큽니다.

한 줌의 재로 변한 친구를 보내며 생각했습니다. 죽음의 무게가 이럴진대 깃털보다 가벼운 삶에 왜 이리도 집착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그 집착이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이 분함을 키우고 그 노여움이 분별력을 잃게 한다면 언제까지 이런 일상의 감옥에 나를 가두어야 하는지...이곳에서 그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젠 정말 없어진 걸까요.

굴레방다리를 지나며 생각했습니다.

무지개보다 찬란한 잿빛 추억이 있었다면 그게 바로 그와 공유했던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R.I.P

J 곁에 항상 평화가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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