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안에 든 쥐

무력감

by 달의뒷면

아버지 장례식장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를 사랑했다. 그 모습 그대로 죽는 순간까지 나를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다. 얼마지 않아 그가 입었던 새하얀 셔츠 같이 빛나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었다. 불안정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나를 끌어당겼다. 지만 애와 결혼은 다른 이야기였다.


그는 함께 살게 된 이후에도 내내 불안정했고 집밖으로 맴돌았다. 7일 중에 6일은 야근하거나 음주했다. 어쩌다 집에 있는 날은 종일 잠을 자다 아이들이 잠든 밤 소파에서 늦은 시간까지 티브이를 보았다. 아이가 생겨도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집에 있었지만 없는 것과 같았다. 혼자 아이들 뒤치닥 거리에 분주하고 숨이 가빴다. 배가 남산만 할 때도 밤중 수유에 잠 못 이룰 때도 그랬다. 그는 잠깐 웃었다가 금세 짜증을 부리고 화를 냈다. 집에서 가족들과 편하게 있지 못했다. 소리 지르고 꾸짖고 비아냥거렸다.


어린이날이 포함된 연휴였는데 가족 누구도 편하지 않았다. 아이들만 보면 모나고 날카로운 말을 쏟아내는 남자로 인해서 모두가 불쾌했다. 같이 있는 건 어색하고 떨어져 있으면 불안한지 아이들을 자기 방식대로 조종하려 한다. 그가 있는 동안 우리는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에 갇힌다. 우리는 웃고 떠들면서 신나게 까불며 놀곤 하는 데 남자가 있을 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언제 갑자기 분노를 터뜨릴지 몰라 방으로 숨어든다. 남자의 심사를 건드릴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연휴를 보냈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된다며 통제하고 억압하는 남자에 아이들이 억눌리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아이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다 함께 울었다. 남자의 눈치를 보면서 참고 있었던 감정이 터졌다. 아빠의 관심과 사랑을 원하는 아이의 눈물을 가 힘들었다. 통제하려고만 하는 아빠에 대한 분노와 서운함이 물기 어린 말속에 담겨 있었다. 화가 났지만 소리 지르고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무력감을 느꼈다. 마음이 혼탁해졌다.


아이를 재우고 밤새워 밀린 일을 하는 날이 많았다. 잠이 깨지 않는 멍한 아침이면 빈속에 연거푸 커피를 들이켰다. 아이들이 먹다 남긴 밥과 반찬을 급하게 삼켰다. 허전하고 쓸쓸한 밤에는 혼자 맥주를 마시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기도 했다. 분리수거하면서 맥주캔이 많다고 투덜거렸지만 혼술을 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집에선 늘 혼자였다. 혼자 밥 먹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준비물 챙기고 놀아주고 목욕시키고 책을 읽어주다 잠이 들었다. 내가 아플 때도 아이들이 아플 때도 혼자였다. 몸이 아프면 마음을 좀 되돌이킬까 했지만 소용없었다. 약에 취한 눈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밥을 하고 아이와 놀아준 적도 있었다. 그는 남에게는 웃음도 흘리고 농담도 하고 술도 따라주고 얘기도 들어주면서 내게는 그런 틈을 주지 않았다.


우리는 역할에만 충실하다. 가끔 우리 현실이 소꿉장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현실적인 어색함이 들 때가 있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푸념을 털어놓으면 애 키우면 다 그런 거 아니냐고 내 말을 밀어내며 민망하게 했다. 싸울 일이 아닌데 화를 내고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일하고 살림하고 아이 키우는 일에만 충실하기를 요구했다. 살림살이를 도와 달라고 하면 화를 내며 험하고 과격하게 반응했다.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에 산란하여 잠 못 드는 날도 있었다. 내 감정과 욕구는 뒷전이 된 채 상황에 압도되어 혼자서 종종거렸다. 완고하고 무관심한 남자에게 호소하고 부딪히며 싸웠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맹렬하게 부딪히며 싸울 때도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비난하고 방관하고 회피하며 얼룩지게 만들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보다는 거친 말투와 고성으로 맞섰다. 그것이 남자다움이라고 믿는 듯했다. 관계의 균형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의 원인을 대화를 통해서 풀고 해결점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배우자의 욕구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진로와 문제행동, 살림살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비난하는 방식으로 회피했다. 감정을 나누기는커녕 일상적인 잡담을 주고받는 일이 어려웠다. 다툼은 일방적인 윽박과 협박으로 끝났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철없는 남자의 품행을 너그럽게 품지 못하고 예민하게 굴어 집안 분위기를 망가뜨린다고 비난했다. 경력을 위한 도전을 비아냥거리고 폄하했다. 갑자기 찾아온 막내를 내 탓이라고 몰아세웠다.


원망하고 분노한 만큼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도 했다. 깊은 밤 잠 못 이루면서 받을 수 없는 것을 기대하는 나를 자책하며 울기도 했다. 친밀함과 애정을 기대했지만 충족하지 못했다. 이제는 힘에 부친다. 그의 제어되지 않는 분노와 날카롭고 차가운 말에 아이들까지 휩싸이는 일이 반복됐다. 고집스러운 행동, 예상하기 힘든 변덕, 회피로 이어지는 잦은 분노,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조마조마하고 불편했다. 침묵하게 되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가 어떻게 한들 변화될 수 없다는 걸 노력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내가 원하던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아이들의 눈을 의식해서 피하기만 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왜 나는 이것을 주저하며 끊어내지 못할까? 나를 옥죄는 나쁜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투정을 부리거나 요구사항을 적은 편지를 보내면 아버지는 늘 대답이 없었다. 답장이 없었다. 부정도 긍정도 반박도 설득도 분노도 표현하지 않았다.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존재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느낌이었다. 지금의 남자도 다르지 않다. 화를 내도 울면서 힘들다 말해도 대답하지 않는다. 사과도 변명도 없다. 내가 그들에게 한말은 과연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지금 생각하면 아빠의 태도가 이상했는데 대꾸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상대가 아빠에서 남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억누르고 참는 일에 익숙해졌다. 나의 욕구와 기대가 보잘것없다고 축소했다. 억울하고 배려받지 못하는 느낌이었지만 표현하지 못했다. 그때는 왜 인식하지 못했을까? 아빠의 답장 없는 편지에 화를 내지 못한 것처럼 내 감정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 그것만 골똘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느라 나를 살피지 못했다.


육아는 나에게 다 맡기고 모르는 척하면서 무책임하고 무심한 것은 정작 그 인데 내가 왜 미안해했을까? 이렇게 지내는 게 아이들에게 좋은 것일까? 아빠를 보고 웃으며 긴장을 풀 수가 없는데 아이들이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엄마 역할을 잘하면 가족 모두 편안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포기하고 단념하는 것이 많았지만 남자가 헤아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다. 그의 생활은 변함이 없다.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시고 밤늦게 영화를 보고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다. 몸이 좋지 않은 건 내 문제였다. 일에서 육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했다.


도대체 왜 이기적인 그를 사랑했던 것일까? 도대체 왜 아무렇게나 대하는 그를 애써 이해하려 했던 것일까? 도대체 왜 메마른 사람에게 애정을 원하고 매달렸던 것일까? 도대체 왜 나쁜 그를 떼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이건 좀 무언가 지나치고 이상하지 않은가? 집안에서도 고단한 몸을 편히 쉬지 못해 허약해져 가는 나와 한낮까지 늦잠을 자는 그의 하루가 너무도 대조적이지 않은가?


한 사람을 사랑하고 성실하게 가정생활을 한 것뿐인데 꼼짝없이 엄마와 아내라는 역할에 발목이 잡혀버렸다. 갇혀버렸다. 언제까지 가정과 직장의 도돌이표에 묶여있어야 하나? 처음 마음을 붙들려 애썼다. 좋았던 적도 있었지만 잠깐이었다. 이젠 소용없는 일이다. 그는 맡긴 짐을 찾으러 오가는 사람처럼 가정과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마음을 누지 않는다. 환멸과 체념만이 남았다.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것이 나를 절망하게 한다.


어떻게 하면 내 행복을 지키며 살 수 있을까? 이제는 나를 지키는 방법이 무엇인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들여다볼 작정이다. 체력을 키우며 혼돈과 막막함 속으로 달려든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가련한 내 운명을 사랑하고 나의 삶을 첫째로 살피겠다. 뾰족하게 박힌 가시를 뽑아내고 나를 쓰다듬겠다. 그 모든 과정이 나를 단단하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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