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ngNew May 03. 2024

[7] 두근두근, 번역 소개팅

번역 탱커 스탯 기록부

요즘은 TV를 틀면 연애 관련 예능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솔로가 된 사람들이 자신의 반려자를 찾기 위한 매우 정석적인 연애 프로그램부터 해서 헤어진 연인들을 한 자리에 모아 거기서 다시 새로운 인연을 찾게 해 주는 프로그램, 남매가 출연해 각자 끌리는 이성과 썸 타고 사귀는 프로그램, 커플들의 다양한 고민을 재구성한 이야기를 듣고 패널들이 공감하며 해결책을 찾는 프로그램 등 수많은 연애 관련 예능이 꾸준히 전파를 타고 있습니다. SNS에서 밈도 만들어지고, SNL과 같은 스탠드업 코미디에서도 자주 패러디가 되는 걸 보니 시청률도 꽤 높은 모양이에요.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프로그램이라, (물론 고구마도 있지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근두근한 감정을 느끼게 해요. 코로나 시대가 지나가면서 사람 간 대면하는 일이 줄어들고 그러다 보니 자기와 맞는 소중한 인연을 찾을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어져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어찌 보면 '대리 두근두근'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기도 하겠죠?


이렇듯 새로운 사람과 연이 닿는 건 굉장히 설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꽤 긴장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모른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죠. 개인이 느끼기에 나와 잘 맞는 사람이라면 연애까지 순탄하게 흘러갈 수도 있는 거고, 그렇지 않다면 '그럼, 즐거웠습니다'하고 연을 마무리짓게 될 겁니다. 그리곤 또다시 다른 인연을 찾아 나서는 거죠.


이와 같이 인연을 만나는 방식은 번역 업계에서도 똑같습니다. 번역 업계에서 인연이라면 저처럼 PM이 좋은 회사를 선택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 안에서 좋은 사람이 있는 팀에 들어가는 것, 미처 알지 못했던 인사이트를 알게 해 준 괜찮은 동종업계 사람을 만나는 것, PM으로서 일하기 참 좋은 번역사를 만나 서로 긍정적인 협업 관계를 이어가는 것 등이 있겠네요. 이중 오늘은 네 번째, '좋은 번역사를 만나기'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합니다.


번역 프로젝트 한 개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부분은 프로젝트를 의뢰하는 클라이언트, 한 부분은 프로젝트를 이끄는 PM, 한 부분은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엔지니어, 그리고 마지막 한 부분은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번역사죠. 앞의 세 사람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어떤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정규직 직원들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번역사'는 정규직원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프리랜서일 확률이 높아요. 본인의 스케줄을 온전히 스스로 관리하며 여러 번역 업체와 계약해 많은 일을 받아 작업하는 분들이죠. 어떻게 보면 1인 기업인 셈이에요. 상호 계약한 회사에서 번역 일감을 따내 정해진 기한까지 번역하고 납품하는 게 이분들의 임무죠. 그 대가로 일정 금액을 지급받고, 이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이 됩니다.


여기서 들여다볼 부분이 '번역 일감을 따낸다'는 지점입니다. 보통 일감을 따내려면 위에서 말했듯 먼저 상호 계약을 해야 합니다. 계약 내용을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대부분 비밀 잘 유지하고 단가는 얼마로 책정하고 지급일은 언제고 등등의 내용이 담기죠. 이렇게 성공적으로 계약을 했으면 때에 따라 다르지만 샘플 테스트를 보고 거기에 합격하면 계약한 회사의 인재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회사의 PM은 이제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왔을 때 이 인재풀에서 괜찮은 번역사 없나 물색한 후 '아, 이분이 잘해주시겠다!'라는 판단이 서면 그분께 작업을 의뢰드립니다. 그 순간이 바로 담당 PM과 번역사가 서로 인연이 닿는 지점입니다. 소개팅에 비유하자면 소개팅 이전 서로의 정보를 탐색해 '괜찮은데?'라는 생각이 들어 첫 만남을 가지게 되는 때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게 첫 만남에 대화를 나누며 서로 상대방이 앞으로 계속 만날 만한 사람인지를 알아봅니다. 이는 프로젝트 진행에도 동일한데요, 프로젝트 하나를 진행하면서 PM은 이 번역사의 실력과 더불어 응대 태도는 어떤지, 지침을 제대로 읽는지, 납품이 제때 이루어지는지, 쿼리(질문 사항)가 있을 때 바로바로 질의하여 번역 품질 향상을 시킬 의지가 있는지, 그 쿼리의 수준은 어떠한지 등 다각도로 번역사를 판단합니다. 번역사 역시 이 회사는 내가 번역을 잘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자료를 지원해 주는지, PM의 응대 실력은 어떠한지, 보유한 TM(Translation Memory)이나 TB(Termbase)의 수준은 어떠한지 등 많은 부분을 평가하게 되죠. 여기서 서로 '선연(善緣)'인지 '악연(惡緣)'인지가 나타납니다.


저는 PM이기 때문에 PM 입장에서 말을 해 보자면, '선연'인 번역사의 조건은 당연히 품질입니다. 모든 게 좋아도 품질이 별로면 PM은 해당 번역사를 다시 기용하지 않거든요. 특히 언어쌍이 영한(English - Korean), 중한(Chinese - Korean), 일한(Japanese - Korean)이고 분야가 게임 또는 마케팅인데 품질이 별로라면 더 빨리 풀에서 제외됩니다. 안타깝지만 이 언어쌍, 이 분야는 할 사람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에요. 초보 번역사가 입문하기 쉬운 분야이기 때문에 사람도 많고, 그래서 진짜 잘하는 번역사도 많습니다. 다만 위 분야가 아닌 전문 분야, 예를 들면 법률이나 의학 분야는 사람 수도 적을뿐더러 실력 좋으신 분들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예요. 그렇기 때문에 단가도 높습니다. 심한 경우는 같은 영한인데 일반 마케팅, 게임 분야보다 거의 두 배는 더 받는 분도 봤어요. 그만큼 업계에서 '이 사람 번역 좀 하신다'는 평가가 돌면 일반 직장인보다 더 많이 버실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분야 특성상 번역해야 하는 내용이 한정적이라 일감 자체는 게임이나 마케팅보다는 많지 않습니다. 어쨌든 PM이 봤을 때 번역 품질이 상당히 고퀄이다 싶으신 분은 저희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꾸준히 작업을 드리게 되고, 번역사 역시 고정 거래처가 생기게 되니 서로 쭉 인연을 이어가게 됩니다. 소개팅 성공이죠.


두 번째 조건은 매너입니다. 실력, 당연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매너가 꽝이라면? 그 누가 일을 하고 싶겠어요. 이 매너에는 보통 메일이나 문자 등 텍스트 매너와 전화나 대면 미팅의 음성 매너가 포함됩니다. 말 하나에도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죠. 텍스트 매너나 음성 매너가 좋으신 분들은 PM 입장에서 꽤 각인이 됩니다. '아니, 서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인데 매너가 별로일 수 있다고?'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예, 생각 외로 꽤 많습니다. 물론 비속어를 쓰시거나 시비를 거시는 등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을 하시는 분은 당연히 없습니다. PM 입장에서 번역사가 메일이나 문자를 보내실 때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본문을 적으신 다음 '감사합니다, OOO 드림' 정도만 적어도 매너가 괜찮은 분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이런 작은 매너 하나 없이 '파일 보냅니다', '파일 확인해 주세요' 등으로만 보내시면 저도 사람인지라 '되게 성의 없네'라고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전화받으실 때도 '안녕하세요, PM님~'하면서 완전 하이톤으로 밝게 전화받아주시는 분이 계시는가 하면 그냥 '네, 네, 할 수 있습니다, 네, 네~' 하고 끊으시는 분이 계세요.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상대방이 하는 말에 대답만 하고 앞에 놓인 음식만 먹고 있는다면 '아, 나랑 대화하기 싫은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티키타카를 중요하게 본다고 하던데, 기왕이면 기분 좋게 대화가 핑퐁이 되면 서로 좋은 관계가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은 시간 약속입니다. 품질 좋고 매너 최고신데 매번 납품 지연이 발생한다면 이것 또한 굉장히 큰 이슈로 다가옵니다.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겠지만 납품 일자를 제때 지키지 못하는 번역사는 보통 꽤 높은 확률로 인재풀에서 제외됩니다. 물론 단칼에 아웃되는 건 아니고 몇 번 주의를 주긴 하죠. 그럼에도 계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신다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여기까지인가 봐'를 외치게 됩니다. 번역 프로젝트는 번역사가 번역을 진행하는 것 이후에도 다양한 작업이 잡혀 있습니다. 바로 다음 단계인 검수부터 해서 필요하다면 엔지니어 작업이 추가될 때도 있고 영상이나 이미지라면 별도 편집 시간이 또 들어갑니다. PM은 클라이언트 최종 납품일에 맞춰 각 단계별로 타임라인을 지정해 두는데, 번역 단계에서 시간이 틀어지면 이후 과정이 모두 어그러질 확률이 있습니다. 품질과 매너는 클라이언트와 PM에 따라 처음부터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 약속은 달라요. '맞추냐, 못 맞추냐'의 두 가지 선택지만 존재할 뿐입니다. 저희가 어떤 번역사에게 첫 작업을 의뢰드렸는데 해당 작업부터 시간 약속을 어기게 된다면 첫인상에 큰 감점 요인이 되겠죠. 첫인상의 중요성은 다들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건 소개팅에 늦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밖에 없고 이게 반복되면 결국 애프터는 없는 거죠.


그러나 위 세 가지 조건은 PM이 클라이언트와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지 말지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클라이언트가 어떤 번역 회사에 프로젝트를 의뢰했는데, 품질 엉망에 응대 매너도 별로고 시간 약속마저 지키지 않는다면 그 회사에 더는 의뢰하지 않을 테니까요. 전 PM이라 번역사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 업계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동일하게 해당이 되는 이야기예요. 자신이 어떤 포지션에 있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번역이 운명이고 천생연분이라면 그 연이 끊어지지 않도록 위 세 가지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6] 인간 시대의 끝이 도래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