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 하면 차분해진다고 누가 그랬어
인터넷에 ‘푸르시오’라고 검색해보면 잔뜩 화난 썸네일과 제목의 영상을 볼 수 있다. 영상 속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화가 나거나 슬픔에 잠겨 이미 많이 진행된 목도리/스웨터 등을 하염없이 풀고 있다. 제목에는 눈물 이모티콘이나 ‘ㅠㅠ’ 혹은 느낌표가 붙었을 거고.
뜨개인의 유행어 ‘푸르시오’는 말 그대로 뜨던 편물을 풀었다는 말이다. -물론 문법에는 맞지 않는 말이지만 그런 거 하나하나 따지면 신조어는 다 없어져야 하니 넘어가도록 하자.- ‘푸르시오’의 이유는 다양하다. 실수로 잘못 떠서, 완성하고 보니 원하는 기장보다 길거나 짧아서, 사이즈가 맞지 않아서,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런저런 이유로 다 풀고 나면 라면처럼 꼬불거리는 실 무더기와 마주할 수 있다. 푼 양이 많을수록 라면의 양은 많아진다.
나도 또 한 번의 ‘푸르시오’를 경험했다. 앞서 말한 이유 중 어느 것도 해당하지 않는 이유로. 남자친구를 위해 뜨던 니트가 있었는데 반쯤 진행했을 때 헤어졌기 때문이다. 내 인생 가장 오랜 기간인 4년간 만났던 사람과의 이별이었다. 헤어지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완성하고 헤어진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며 자기 위안을 했다. 이미 헤어진 거, 내가 뭘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헤어진 다음 날 바늘을 빼내고 실을 모두 풀어냈다. 조금이라도 빨리 풀어야 그를 잊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미련 없이 풀었다. 목에서 시작해 가슴 밑부분까지 떠놨던 편물을 모두 푸는 데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분명 거기까지 뜨는 건 5일은 족히 걸렸던 것 같은데. 상념을 뒤로 하고 어지럽게 쌓인 실을 동그랗게 다시 감아놓았다.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뜨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실이지만 새것과는 역시 많이 차이가 났다. 불규칙적으로 감은 탓에 타원형이었고, 손으로 감은 탓에 실 사이 틈이라고는 없어 단단한 공 같았다. 새 실보다 훨씬 단단하고 큰 공이 나쁘지 않았다. 새로 시작하는 데 문제없지 뭐.
그에게 주려던 니트의 사이즈를 줄여 내가 입을 니트로 다시 떴다. 특별한 무늬나 기법 없이 원형으로 쭉 뜨면 되는 옷이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글을 쓰다가, 일을 하다가, 영화를 보다가 문득문득 그가 떠오를 때마다 떴다. 완성하고 입어보니 여전히 조금 크기는 한데, 마음에 든다. 소요 기간은 약 2주. 시간 틈새를 이용했다는 걸 고려하면 빨리 뜬 편이다. 내가 손이 느린 편이기도 하고.
사용한 실은 필 루스티크. 면 65% 레이온 25% 린넨 10%가 섞인 혼방사다. 50g에 8,000원이었는데 지금은 절판되었는지 구매할 수 없는 실이 되었다. 옷 하나 뜨는데 보통 300g 내외가 들어가는 걸 감안하면 꽤 비싼 실이다. 린넨과 면이 섞여 시원하고, 여름에 사용하기 좋은 실이었다. 4.5mm 대바늘로 떴고, 성글지 않고 적당히 촘촘한 짜임새다. -처음에 5mm로 떴다가 너무 성글어 빠르게 ‘푸르시오’ 했다.-
처음 의도와 다르게 내가 입을 옷이 되었지만 만족한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이 옷을 입을 때마다 그가 생각나는 것. 처음에 그를 생각하며 떴던 탓인지 옷이 자꾸 그에게 가기를 원하는 것 같다. 옷이 아니라 내가 그를 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게 맞는 것 같으니까.
처음 뜨개질을 시작한 건 생각이 너무 많아서였다. 단순하고 반복된 행동은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렇게 뜨개를 시작한 지 3년이 넘었다. 취미로 시작했지만 진심이 된 지는 그 기간의 반 정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뜨개를 선물한 것도 내 사랑 표현의 일부였다. 아쉽게도 니트는 주지 못했지만 그에게는 내가 뜬 목도리가 있다. 헤어지면서 버렸을까? 아니면 아직 여름이니 옷장 구석에 숨어있는 목도리는 까맣게 잊고 있을까. 아마 그의 성격상 날씨가 쌀쌀해져 옷장을 정리하며 발견할 확률이 높다. 그럼 그는 목도리를 보며 잠깐이라도 내 생각을 할까? 목도리를 선물했을 때 한없이 밝게 웃던 얼굴이 여전히 생생한데, 조금 더 일찍 옷을 떠줄걸. 후회해도 방법은 없다.
지금은 다른 옷을 뜨고 있다. 꽈배기 무늬가 들어간 반팔 니트다. 이제 시작한 터라 여름 내 완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완성했을 때 이미 여름이 다 지나갔다면 화를 한 번 내고 다음 여름을 기다릴 테지. 나의 뜨개란 언제나 그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