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중립기어 박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1)

by Day One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온라인 공간을 잠식하는 익숙한 문장이 있다. “일단 중립기어 박습니다.” 이 말은 겉으로만 보면 신중함과 이성의 언어처럼 들린다. 감정에 휩쓸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충분한 정보가 모일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합리적인 선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초기 이 표현은 감정적 마녀사냥을 경계하는 일종의 안전장치로서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이 표현이 사용되는 맥락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본래의 순수성을 대부분 상실했음이 드러난다. 그것은 이제 책임 있는 판단을 회피하기 위한 방패이자 무관심과 두려움을 번듯한 이성으로 포장하는 세련된 레토릭이 되어버렸다. 이 현상은 단순한 인터넷 유행을 넘어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판단의 피로와 도덕적 무감각을 드러내는 병리적 징후에 가깝다.

사람들이 중립을 선언할 때 그 내면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은 진실 탐구의 의지가 아니라 틀리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다. 디지털 시대의 발언은 영원히 기록되고 누구나 손쉽게 과거를 소환할 수 있다. 섣불리 한쪽을 비난했다가 나중에 사실이 뒤집히면 자신은 경솔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공포가 팽배하다. 이른바 ‘박제’될 위험 앞에서 개인은 자기보호 본능을 발휘한다. 이때 중립은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도피처를 제공한다.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으면 적어도 틀릴 일은 없다는 소극적 계산이 작동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이성적 유보를 표방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체면과 안위를 지키려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전부일 때가 많다. 중립은 진실 추구의 과정이 아니라 책임 회피의 결과가 된다.

이러한 자기 방어는 종종 미묘한 지적 허영심과 결합하여 더욱 견고해진다. 남들이 분노와 슬픔 같은 감정의 파도에 휩쓸릴 때 “나는 감정적으로 사안을 보지 않는다”라고 선언하는 행위는 스스로를 격랑 위에서 상황을 관조하는 현명한 관찰자의 위치에 놓는다. 이 포지션은 소셜 미디어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연출하는 데 매력적인 도구로 쓰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진실이나 피해자의 고통이 아니라 ‘나는 휩쓸리지 않는 냉철한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의 구축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립은 공동체의 윤리적 태도가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을 꾸미는 자기 연출의 도구로 전락한다. 냉철함은 뜨거운 진실을 외면하는 차가운 무관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thoughtlessness)가 악의 평범성을 낳는다고 경고했다. 여기서 무사유는 지능의 부족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는 노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지금의 ‘중립기어’ 현상은 바로 이 무사유의 현대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실관계의 복잡함과 씨름하고 고통받는 당사자의 입장을 헤아리려는 노력을 건너뛴 채 ‘중립’이라는 단어 뒤로 숨어버리는 행위는 사유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누구도 불의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게 되며 결과적으로 시스템의 악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 중립이 특히 위선적인 이유는 그것이 결코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평소에 신뢰하지 않던 정치 세력이나 거부감이 있던 집단에 불리한 의혹이 터지면 중립이라는 단어를 쉽게 잊는다. 이때는 작은 정황만으로도 가혹한 비난을 퍼붓는 것이 당연시된다. 반면 평소 호감을 가졌던 인물이나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된 집단이 논란의 중심에 서면 그때서야 갑자기 엄격한 사실 검증과 신중한 태도를 호소하며 ‘중립기어’를 내세운다. 최근 2025년 12월 박나래 매니저 갑질 의혹 사건 당시 많은 팬이 “양쪽 입장을 모두 확인해야 한다”며 신중론을 펼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처럼 기준이 고무줄처럼 변하는 선택적 중립은 사실상 중립이 아니라 자기 진영을 보호하기 위한 논리적 방어막에 불과하다. 이는 공정한 토론의 장을 파괴하고 사회적 신뢰를 잠식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해야 한다. 모두가 침묵하고 판단을 유보할 때 이익을 보는 쪽은 누구인가. 사회적 논란은 대부분 힘의 비대칭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이미 막대한 자원과 권력을 가진 쪽은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다. 여론이 잠잠해지고 대중의 관심이 식을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있다. 반면 힘없는 개인이나 약자는 즉각적인 사회적 관심과 지지가 절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중립’이라는 이름의 유예는 현상 유지를 의미하며 이는 곧 강자의 입장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정치적 행위가 된다. 불편한 진실은 중립이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윤리학의 고전적인 논쟁인 정의의 윤리와 배려의 윤리를 가져올 수 있다. 정의의 윤리가 공정성 원칙 절차를 강조하며 모든 증거가 나올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라고 요구한다면 배려의 윤리는 눈앞에 있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관계 속에서 책임적으로 반응할 것을 요구한다. 현대의 ‘중립기어’ 문화는 배려의 윤리를 철저히 무시하고 기계적인 정의의 윤리 뒤로 숨는다. 법적 판결이 최종적으로 내려지기 전까지 피해자의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은 법정의 시간표에 따라 흘러가지 않는다. 공동체가 외면하는 사이 누군가의 삶은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될 수 있다.

칸트가 말한 ‘이성의 공적 사용’은 각자가 자신의 생각을 공론장에 용기 있게 내어놓고 집단적 토론과 비판을 통해 더 나은 결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하버마스가 이상적으로 그린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공간 역시 왜곡 없는 대화를 통해 상호 이해와 합의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모든 철학적 지향점은 개인이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최소한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 ‘중립기어’는 판단을 유보한다는 명목으로 이 최소한의 참여 의무마저 거부하며 결과적으로 건강한 공론장의 성립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진정한 의미의 중립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지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과학자가 최선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변수를 통제하고 데이터를 검증하며 가설을 수정해나가는 역동적인 과정에 가깝다.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도 잠정적인 판단을 내리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면 언제든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입장을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열린 태도가 바로 진짜 지성이다. 이는 자신의 판단에 책임을 지겠다는 용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결국 이 문제는 우리가 어떤 시민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귀결된다. 판단의 위험을 감수하고 공동체의 문제에 개입하는 책임 있는 주체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항상 한발 뒤에 서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책임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안전한 방관자로 남을 것인가. 후자의 삶이 쌓여 만들어진 사회는 필연적으로 차갑고 무관심하며 약자에게 더 가혹한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자동차의 중립기어는 스스로 나아갈 힘을 포기한 상태다. 그 차의 행선지는 결국 외부의 힘이 결정한다. 이제는 편리한 중립기어에서 손을 떼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방향을 결정하는 연습을 시작해야 할 때다. 그것이 무너져가는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하고 책임 있는 시민으로 다시 서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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