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론 #1
시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우주에 던지는 질문 끝에서 마주하는 결론은 그렇다. 우리는 늘 사건의 기원, 모든 것의 첫 장면에 집착한다. “언제 우주가 시작됐나?” “무엇이 최초의 불꽃을 만들었나?” 하지만 물리학의 시선은 점점 더 ‘영원의 반복’이라는 기묘한 풍경 쪽으로 기울고 있다.
중학교 때 나는 ‘빅뱅(Big Bang)’을 처음 들었을 때 거의 경외심으로 떨었다. 한 점에서 모든 것이 일시에 태어났다니!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가, 폭발로 인한 팽창으로 돌연 히 존재하게 되었다는 건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현대 우화였다. 교과서는 이렇게 말한다. “138억 년 전 우주는 아주 작고, 아주 뜨거웠다.” 남은 건 팽창뿐이다.
그런데, 과학은 신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귀납의 끝에는 이론을 뒤흔드는 관찰이 따라온다. 현대 천문학자는 우주배경복사, 암흑 에너지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팽창의 속도, 그리고 관측되는 블랙홀의 기이한 질량까지. “이건 한 번의 사건으로 설명되지 않아.” 그 신화에 작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나는 요즘, ‘시작’이라는 개념을 의심한다. 가령, 무언가를 설명하려면 항상 뭔가 더 근본적인 것이 필요하다. 우주가 어떻게 시작됐나? 빅뱅이다. 그런데 그 ‘빅뱅’은 어디서, 어떻게, 왜 생겼을까? 우주의 기원이나 블랙홀 내부를 파헤치는 천문학 논문을 읽다 보면 자꾸만 껍질만 벗겨지는 양파 같다. 없던 게 갑자기 있었으니, 당연히 그 전에 뭔가 더 있었을 게 분명한데 우리는 늘 “그 이전에는?”이라는 질문을 멈출 수가 없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반복하는 우주’, ‘시작 없는 우주’, ‘진동 우주론(Cyclic Universe Model)’ 그리고 ‘바운스 우주론(Bouncing Universe Model)’이다.
진동 우주론은 우주가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영원히 팽창하고 수축한다는 가설이다. 한 번의 빅뱅, 한 번의 팽창, 그리고 영원의 죽음으로 끝나는 ‘선형적 우주’ 대신 우주는 끝없이 커졌다가 다시 모여들고, 짜부러진 다음 또다시 폭발한다. 마치 진동처럼 피로해진 경우엔 잠깐 멈췄다가 다시 반복한다.
이를 지지하는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팽창하다가 중력이 임계치에 도달하면 다시 수축하면서 ‘빅 크런치(Big Crunch)’라는 거대한 압착 사건이 발생하고, 이때 다시 ‘빅뱅’을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한다. 시작은 없다. 존재하는 건 끊임없는 리셋과 반복 뿐이다.
양자 중력(Quantum Gravity), 에크피로틱(Ekpyrotic) 등 여러 최신 이론은, 우주의 팽창이 중단되면 사실상 ‘붕괴’가 아니라 ‘튕김’이 일어난다고 본다. ‘Planck 시간(플랑크 시간)’ 직전에 모든 것이 압축될 만큼 압축되다가 양자적 효과로 인해 쏟아져 나온다. 마치 바닥을 치는 탄환처럼 죽음의 끝에서 바로 다음 시작이 솟구친다.
에크피로틱(Ekpyrotic) 모델에선 더 고차원적 우주(막, brane)가 존재하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떤 차원에서 두 막이 만날 때마다 지금의 우주가 비로소 반복되는 어쩌면 무한한 리듬이 있다고 주장한다. 빅뱅은 그저 주기적 충돌에서 일어난 한 번의 현상일 뿐 우주라는 극장이 멈춘 적은 없다.
그럼 이 반복의 흔적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밤하늘을 바라보면, 1초마다 380억 개의 별들이 태어나고 죽는다. 우주배경복사는, 빅뱅의 흔적이자 사실은 우주가 불타고 끊임없이 식었다가 다시 불타는 과정의 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별빛을 볼 때마다, 이 별이 여러 번의 빅뱅-빅크런치 주기를 거쳐, 반복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존재는 단 한 번의 불꽃이 아니라 끝없는 흔들림과 리셋에 불과하다.
블랙홀을 보며 상상해보라. 그 내부엔 시간조차 멈춘다고들 하지만 반복하는 우주론에 따르면 그 안에서도 언젠가는 새로운 팽창의 씨앗이 자라난다. 나를 삼키는 어둠 속에서도 우주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딘가의 시작점에 있는 걸까. 빅뱅은 시간의 제로포인트가 아니라, 끝없이 반복되는 장대한 퍼레이드의 한 토막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전의 우주가 죽으며 남긴 흔적 위에 서서, 다음 반복을 기다리고 있다.
철학자들은 "처음이 없는 세계는 의미가 없는가?"라고 묻는다. 반대로 나는 생각한다. 시작이 없으니 끝도 없다. 끝이 없으니 우리는 영원의 일부다. 모든 존재가 반복되고 우리는 그 반복 속에서 잠깐 깨어난다.
문득 두려워진다. 나라는 존재,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쏟아지는 시간. 내가 겪는 모든 공포, 희열, 슬픔, 기쁨, 사랑. 그 모든 감정은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반복된 우주 속 어느 한 번의 파동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이 끝나면, 우주는 다시 태어난다. 나는 사라지고, 또 다른 누구인가로 바뀐다.
시작이 없는 세상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영원히 반복되는 세계에서, 내 존재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어릴 때 받았던 “태초에…”로 시작하는 모든 이야기들이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우주가 반복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은 흔적임을 느낀다.
하지만 어쩌면 이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세계가 가장 큰 자유를 준다. 나는 미리 정해진 서막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한 속을 떠돈다. 내 삶의 의미는 ‘한 번만의 역사’에 매이지 않는다. 반대로, 이 반복하는 리듬 속에서 작은 변화 한 번, 작은 생각 한 조각도 우주 전체를 흔들 수 있다.
나는 아직 이 거대한 반복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주의 시작이 없다는 사상은 너무 거대해서, 내 감정의 끝까지 닿지가 않는다. 그런데 그 불확실함이 오히려 나를 더 자유롭게 한다. 매 순간이 어떤 거대한 우주의 한 반복이라면 나는 내 리듬을, 내 숨결을, 내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
빅뱅은 신화일 수 있다. 반복하는 우주는 거대한 리듬이다. 시작은 없다. 모든 것은 반복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나는 아직 작다. 하지만 그 반복의 한 한가운데에서 나는 오늘도 나만의 의미를 찾아 흔들린다.
우주는 영원히 흔들릴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떨림의 한 점에서 살아간다.